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김영식]북한의 시계는 다른 속도로 간다

입력 | 2019-01-21 03:00:00


김영식 국제부장

북한은 다른 나라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특수한 협상 재주를 갖고 있다.

각종 회담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남북 회담을 비롯해 해외에서 벌어진 각종 회담을 취재할 때마다 느꼈던 것인데, 희한하게도 효과가 꽤 크다. 남북관계가 어그러지거나, 북-미 정상회담이 정체되면 날짜까지 세면서 ‘뭘 제시해야 북한이 회담에 나올까’라며 접근법을 고민하곤 한다. 북한 회담 일꾼(대표단)들도 회담장에 나오면 스스럼없이 “우리가 나와 줬는데…”라고 말할 정도다. 상대방을 애태우는 전술의 달인인 셈이다.

북한이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건 북한의 시계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정책을 잘못 다루면 각종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 독재체제 아래에선 이런 압박이 없다. 그러니 상대방의 정치적 상황을 활용해 가장 유리한 시점을 선택하면 된다.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18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90분간 만난 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2월 하순에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11월에 나왔어야 할 사안이지만, 시간을 둘러싼 환경이 유리해졌다고 판단했는지 북한이 이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또 다른 신공에도 능수능란하다. 이미 합의했던 사안을 잘게 나눠 새로운 카드로 활용하는 기술이다. 2차 회담을 앞둔 지금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와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제재 완화 조치가 논의의 중심에 올라왔다.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나왔던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합의나 핵 신고 검증 얘기는 어느새 사라졌고, 미국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다는 ICBM 논의가 ‘진전된 비핵화’라는 포장을 두르고 나왔다.

반복적인 강조로 상대방을 학습시키는 효과도 북한의 전술이다. 북한은 핵 문제가 불거진 이래 한국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북한과 미국 간 문제라고 주장해왔다. 그래서인지 정부가 북-미 정상회담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비핵화가 아니라 핵을 동결하고 미사일을 폐기하는 정도라면 미국과 북한 정상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해 싱가포르 1차 회담 때부터 새로 선보인 절대신공의 하나는 바로 ‘톱다운 방식’의 협상이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과만 얘기하려 한다고 미 관리들은 불만을 나타낸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나왔던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발표는 한미 양국 실무자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미소 지었을 것이다. 하나하나 따지는 실무자보다는 큰 선물을 주는 트럼프에게 집중하는 것이 톱다운 모델의 실체이다.

이런 협상의 판을 짜려고 북한은 시계를 천천히 돌려가며 회담 일정을 연기시켜 온 것은 아닐까. 아마도 2차 회담에서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꺼내가며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축 얘기를 하도록 집요하게 설득할지도 모른다.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도 경제적 이해관계로 재단하는 트럼프는 톱다운으로 접근하기에 최적의 파트너라는 판단 아래에서.

그렇다 보니 처음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초상화를 주문했지만 핵 동결과 ICBM 폐기라는 실루엣만 전달받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북한과의 회담은 대성공인데 북한은 핵을 계속 갖게 되는 그런 역설적인 상황 말이다.
 
김영식 국제부장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