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 북-미 정상회담 앞두고, 核보유 인정 ‘진실의 순간’ 닥쳐 美, 압박 동력 떨어지자 딴 길 모색… 南, 北에 훈풍 보내며 핵 포기 유도 애초부터 도달할 수 없는 정책목표
박제균 논설주간
선장의 어조는 비장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번 목적지로 정한 ‘그곳’으로 항해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곳이 해도(海圖)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라고 말해주는 항해사는 없었다. 선장이 바뀌면서 항해사들을 모두 초짜들로 갈아 치웠기 때문. 벼락감투에 감읍(感泣)한 초보 항해사들은 오히려 선장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는 항로가 나타날 것”이라고 귀엣말을 해왔다.
선원들도 항로가 이상하다고 눈치 챘다. 그렇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전임 선장에게 충성했다는 이유로 무참히 도태되는 동료들을 봤기 때문. 한두 명의 선원이 항로에 이의를 제기하며 휘슬을 불기도 했다. 하지만 선장과 항해사들은 “좁은 선실에 처박힌 하급 선원이 뭘 알겠느냐”며 묵살했다. 선원들은 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선장은 바뀐다. 그때까지 국으로 죽어지내면 된다. 너무 열심히 하다간 다음 선장에게 찍힌다.
선장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켜도 초보 정책 책임자들은 “맞는 방향”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정책 실무자들은 숨죽이며 항해해 온 대한민국호(號). 이 거대한 배가 맞닥뜨릴 첫 번째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 다가왔다. 모두가 내심 인정하면서도 공인하기는 싫은 그 진실.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불편한 진실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이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란 ‘편의적 낙관론(wishful thinking)’에 빠져 이 진실을 외면해왔다. 미국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한국이 주도적으로 나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먹고살 만하게 해주면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순진한 믿음에 빠져 대북정책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왔다.
역사상 자국의 힘으로 핵 개발에 성공한 나라의 지도자, 특히 자신의 집권 시 핵을 거머쥔 권력자가 스스로 포기한 일은 없다. 당신이 김정은이라면 할아버지부터 3대에 걸쳐 국제사회의 무수한 핍박을 감내하며 자기 대에 이르러 비로소 갖게 된 ‘절대 무기’를 포기하겠는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 목숨 아니면 권좌가 위태로울 때다. 군사행동은 전자를, 대북 압박은 후자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군사행동은 이미 물 건너 갔고, 대북 압박도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북핵 당사자인 한국과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미국이 똘똘 뭉쳐 물샐틈없이 제재와 압박을 가해도 될까 말까인데, 한국은 북한에 뒷문을 열어 주지 못해 안달이다.
2월 말로 예상되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런 불편한 진실의 암초가 윤곽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도 국제사회가 핵보유국으로 공인해 준 일은 없다. 공인받은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뿐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등 3개국은 핵보유국으로 간주된다. 북한이 이런 반열에 오르는 진실의 순간이 닥친다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남북 화해와 경협으로 북에 훈풍을 불어넣으면서 동시에 핵 포기를 유도한다는 정책의 목표점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런 이상향은 없다.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Ou(없다)+Topos(장소)다. 이상향은 세상에 없는 곳이다. 한 번만 방향을 잘못 잡아도 나라의 명운이 뒤바뀌는 외교안보의 세계에는 더더욱.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