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19년 오늘,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가 67세로 훙서(薨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건강하던 고종이 이날 새벽 식혜 등 음료수를 마시고 갑자기 쓰러졌고, 시체가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는 점 등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노한 민심은 2·8독립선언의 동력이 됐고, 고종의 인산일(因山日·3월 3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모인 백성들은 3·1만세운동에 대거 합류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시위 도중 영전이 있는 경운궁에 몰려가 울부짖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특히 일제는 장례행렬 선두에 일본 전통 제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을 세웠는데 조선왕조 전통 의례가 아닌 일본식으로 왜곡된 장례식도 민심에 불을 지른 요인이었다.
▷고종의 훙서는 제국(帝國)을 마감하고 민국(民國)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으로 이어진 정신을 잇기 위해 그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더 이상 ‘왕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망국의 군주라는 한계 속에서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 실패한 군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차가웠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릉에 묻혔다. 고종보다 24년 전에 일본인 자객에게 살해된 뒤 서울 청량리 근처의 천장산에 묻혔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도 그곳에 합장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덕수궁 인근에 ‘고종의 길’을 조성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일제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한 길이다. 대구 중구에는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순행을 하며 일본 건국신화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안치한 황대신궁을 참배한 길(순종황제남순행로)이 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다크투어리즘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일제에 의해 무력한 지도자로 색칠돼온 고종에 관한 진실을 다시 세우고 아픈 시대의 교훈을 새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