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21일 고종 서거 100주기… 이태진 교수가 말하는 고종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종의 100주기(21일)를 앞둔 18일 고종이 승하했던 서울 중구 덕수궁 함녕전 앞에 섰다. 이 교수는 “100년 전 3·1운동은 동아시아와 세계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강력하고 명쾌하게 제시했다”며 “이를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망국에 책임이 있는 유약한 군주’인가 ‘자주 독립과 근대화에 힘쓴 비운의 황제’인가. 조선 고종(1852∼1919)만큼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지만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다는 사실은 잊기 일쑤다. 21일로 광무황제, 곧 고종이 서거한 지 100주기를 맞는다. 근대사와 고종, 대한제국 연구의 권위자로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불법·무효를 밝히기도 했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76)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8일 만났다.》
고종의 인산일이었던 1919년 3월 3일 흥인지문 옆을 지나가는 견여(肩轝) 행렬.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 교수는 2009년 ‘역사학보’에 실은 논문에서 고종 독살은 풍문이 아니라 “일본 정부 수뇌부가 지시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고종이 항일전선에 다시 나설 것을 우려한 일제가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1919년 10, 11월 일기 등을 독살의 근거로 들었다.
이 일기에는 구라토미가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나온다. 정리하면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 곧 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는 것이다. 일기에서 구라토미는 궁내성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독살에 관해 확인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라토미 역시 ‘풍설’을 옮긴 것 아닌가.
“일기에는 들은 얘기 형식으로 옮겨놨지만 구라토미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나중에 수기에서 시아버지인 고종의 죽음에 대해 ‘나도 처음에는 뇌일혈일 줄 알았으나 독살이었다’고 반복해 적었다. 그걸 누구에게 들었을까. 이방자 여사가 1922년 아이를 데리고 순종에게 인사하러 창덕궁에 왔을 때 일본 궁내성 직함을 가지고 수행한 사람이 구라토미다. 바로 구라토미에게 들었던 것이다.”
―고종은 유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고종의 업적이 무엇인가.
“국력을 키우려 한 고종의 근대화 사업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장 먼저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 시설을 설치한 건 사치가 아니다. 유자(儒者)들이 거부하는 신문명 도입에 왕실이 앞장섰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1880년대 꾸준히 전신선을 설치한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에는 서울을 현대 도시로 만든다. 길을 넓히고, 1898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달리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남북철도뿐 아니라 함경도 경흥에서 의주까지 동서횡단철도도 계획했다. 1902년에는 중앙은행 설립을 계획하고 지폐 발행 등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모두 했다. 러시아 차관을 도입했고, 벨기에 프랑스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자 했으나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다. 1902년 즉위 40년 축하의식은 통상조약을 체결한 12개국을 초대해 서울의 현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중립국 승인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영일동맹의 영향과 콜레라 유행으로 실패했다.”
―동학농민군을 관군이 함께 진압하지 않았나.
“1893년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질 때 ‘난동분자니까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종은 ‘동학교도도 내 백성’이라며 물리친다. 고종은 나라의 주인이 왕과 소민(小民·백성)이라는 정조 이래 철학을 이었다. 전주 화약(1894년) 뒤에도 고종은 ‘동학교도와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일본 학계에는 당시 조선 관군이 청일 양국군이 나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가 일본군의 위계에 걸렸다는 연구도 있다.”
“항일 ‘국민’ 운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고종은 1895년 홍범14조를 순한글과 국한문혼용으로도 선포했다. 소민 보호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조서는 ‘덕체지’ 3육(育)을 강조하는데, 이게 육영공원의 서양 선교사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 의식이 바탕이 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을 계기로 ‘국민’이라는 말이 폭발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 이름에도 국민회가 많다. 국민국가를 의식하고 민이 주권을 찾기 위해서 싸운 것이다. 3·1독립만세 역시 근대화사업을 하던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흩어져 있던 각 단체를 하나로 뭉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거민족적 거국적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다.”
―국민에 대한 고종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나.
“태황제(고종)가 1909년 3월 서북간도민에게 내린 교유서 내용이 남아있다. 거기서 고종은 ‘대한은 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 만성(萬姓·백성)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유라야 민이며, 독립이라야 나라(國)다. 민이 쌓여서(積民·적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라고 했다. 이게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다. 내가 부덕해서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이 지경이 됐지만 망했다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종이 황실을 대표해서 사실상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은 국제평화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종은 일제와 힘으로 싸우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18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떠오른 국제평화운동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노벨평화상 제정, 민족자결주의와도 같은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류가 가야 할 길에 역행하는 반동이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가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100주년을 기해 3·1운동의 평화공존 논리를 밀고 나가 일본도 그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