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건 사회부장
그는 11일 검찰 소환 직전 취재진 앞에서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하고 저는 그 말을 믿고 있다”며 “그 사람들에게 과오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제 책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의혹에 관여하지 않은 게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해 6월 1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뭔가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이 지면 칼럼을 통해 그의 발언을 이렇게 분석했다.
법조인은 대개 용어에 민감하고 엄격하다. 판결문을 쓰는 판사들은 특히 더 그렇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핵심 메시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이다. 애매한 용어로 피해간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판사들은 “전직 대법원장이 도주할 리는 없고, 증거 자료가 다수 수집돼 있는데 굳이 구속할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지난해 12월 박병대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 기각 사유와 같다. 당시 법원은 그 전에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윗선으로는 구속 대상을 확대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는 분석이 있다. 임 전 차장의 영장 범죄사실이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 전 대법관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종 결정권자’로 검찰이 지목한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역시 기각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선진 문명국가에서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을 지낸 사람이 재판 업무와 관련해 구속된 적이 있나. 만약 구속되면 국제적인 망신”이라고 말하는 판사도 있다.
그런데 사법부엔 ‘나는 잘 모른다’에 반감을 가진 판사들도 많다. 소장파뿐 아니라 수뇌부도 그렇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양 전 대법원장의 첫 기자회견 직후 전국의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사찰과 통제 대상이 됐던 법관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또 두 번째 기자회견 1시간 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취임사를 통해 “우리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잘못에 대해 진정으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였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잘 모른다’를 사실상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 구속에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속은 그저 수사 수단이고 재판 절차일 뿐이다. 구속이 되건 안 되건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은 조만간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된다. 이른바 ‘사법농단’ 실체가 판가름 나야 하는 재판이다. 검찰 수사 200여 일보다 훨씬 오래 이어질 것이다.
그 법정에서 검찰은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피고인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을까. 사법은 사법농단을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재판이 다 끝나고 나서도 화염병을 대법원장 차량에 던진, 대법원에서 목을 맨 심정을 ‘나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게 될까. 그게 구속 여부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