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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크러시]〈19〉길쌈바늘 치우고 주자를 펼쳐들다

입력 | 2019-01-22 03:00:00


“유림을 싸잡아 도의 법규를 넓혔고 뭇사람에게 푯대를 드리우고 향기로운 꽃을 떨치게 했네. 화려한 채색을 거두고 요사스러운 찌꺼기를 초월했네.”

―신작(申綽)의 ‘유목천부인이씨묘지명(柳木川夫人李氏墓誌銘)’ 중에서



조선시대 여성은 대부분 요조숙녀로 성장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정체성으로 삼았다. 담장 깊숙한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규수(閨秀)는 ‘여자’와 같은 의미였다.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해서 죄 많은 여자라는 의미를 담은 미망인(未亡人) 역시 여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단어였다.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덕무는 ‘사소절’에 이렇게 적었다.

“남편과 시부모가 심하게 성질을 부릴 때 부인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야 한다. 더욱 공순한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남편과 성리학 지식 논쟁을 하고 남성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 여성 학자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할 것이라는 통념을 시원하게 깨뜨린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사주당(師朱堂) 이씨였다.

그는 1739년 청주 서면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1757년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효녀로 인정받았다. 25세에 유한규의 넷째 부인이 됐고 34세(1773년)에 아들 유희를 낳았는데 당대 최고의 학자로 키웠다. 1780년에는 모친을 여의고 3년 후 남편도 죽자 자신이 낳은 유희와 세 딸을 데리고 전처소생인 유흔에게서 독립한다. 1821년 82세로 생을 마감한다.

어린 시절 바느질과 길쌈을 잘해 이름이 났으나 어느 날 바늘을 던지며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출가하기 전부터 이미 글을 짓는 논리와 체계를 체득했고 경전을 연구해 일가친척 남성들을 앞질렀다.

결혼 후에도 사주당에게 현모양처의 의미는 남달랐다. 그녀는 당호를 ‘희현당’에서 ‘사주당’으로 바꿨는데, 사주(師朱)의 의미는 바로 ‘주자(朱子)를 본받다’ 혹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다’는 의미다. 그의 정체성은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가 아니라 성리학자를 향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파 유학자이자 음운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아들 유희는 학문의 길에서 모친(사주당 이씨)을 스승으로 삼았다. 사주당은 남편과의 편지 논쟁에서 주자의 의견에 반대하며 정자(程子)의 의견을 선택하는 당당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면눌 이양연 같은 젊은 학자들이 직접 그녀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고 한원진 송명흠 등 유학자들 역시 사주당을 찬탄하면서 직접 만날 수 없었던 환경을 한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해 새로운 지식체계를 만들어냈다. 사남매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태교를 시험했고 의학서적에 실린 임신부 관련 글을 모았으며 경전을 통해 아이에게 가르칠 만한 내용을 부록으로 첨부했다. 이렇게 만든 책이 바로 조선 최초의 태교서인 ‘태교신기(胎敎新記)’다. 남녀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학문 전반에 정통했던 지식인이었다. 전무후무한 ‘조선시대 새로운 여성 지식인’의 유형을 제시했다.
 
강문종 제주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