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0화>서울 진관사
서울 은평구 진관사 입구 도로에서부터 사찰 근처까지 ‘백초월길’이 조성돼 있다. 초월 스님은 일제강점기 이곳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을 오가며 불교계의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7일 찾은 서울 은평구 진관사 입구에는 태극기 비(碑)가 우뚝 서 있다. 2011년 제막한 이 비에는 태극기와 독립신문(30호)에 실린 시 ‘태극기’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태극기 비가 들어선 데는 사연이 있다.
2009년 5월 26일 오전 9시경 사찰 내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스님, 벽을 뜯었는데 한지에 쌓인 보퉁이가 나왔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이 모인 가운데 보퉁이는 조심스럽게 풀렸다. 보자기처럼 보인 것은 귀퉁이가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있어 몹시 낡았지만 분명 태극기였다. 크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였고,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일장기 위에 덧그려져 독립 의지를 담았기에 의미가 더 컸다. 이른바 ‘진관사 태극기’다. 그 안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32호 등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4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新大韓)’ 3점, 민족을 배반하고 부역하는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 등이 들어 있었다.
일제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초월 스님. 진관사 제공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은 이 태극기로 이어진 초월 스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칠성각 등 일부 전각만 남았다. 만약 칠성각마저 전쟁으로 불탔다면 초월 스님의 염원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다. 부처님의 오묘한 법(法)과 초월 스님의 원력(願力)이 만든 기적이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불교방송 뒤 극락암)은 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관사 독립운동 자료에 대해 “진관사는 마포에 포교당이 있어 중국 및 국내 각처와의 연결이 용이했다”며 “서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 임시정부의 불교계 연락본부가 진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만해가 초월을 불교계를 대표할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꼽았다는 증언도 있다. 초월의 일대기와 사상을 연구해 온 김광식 동국대 특임 교수가 만해의 제자였던 김관호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얘기다. “만해는 백용성 스님, 수덕사 만공 스님, 범어사 오성월 스님, 당시 청주에 있던 백초월 스님 등 5, 6명을 불교계를 대표할 33인 후보로 생각했다. 하지만 독립선언이 짧은 시간에 일제의 눈을 피해 매우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지방에 있던 이들과는 연결이 쉽지 않아 백용성 스님만 포함됐다.”
일제의 문서는 지방 사찰에서 수행하던 초월이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을 1919년 4월로 전한다. 초월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독립군을 위해 전개한 군자금 모금과 ‘혁신공보(革新公報)’ 발간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눌 수 있다. 초월은 불교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혁신공보를 발간해 사장을 맡았다.
○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
‘진관사 태극기’ 영인본을 살펴보며 2009년 발견 당시 상황을 전하는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출가 당시 법명은 동조(東照), 초월은 법호다. 그는 구국당(龜國堂), 구당(龜堂)의 별호뿐 아니라 최승(最勝) 의수(義洙) 의호(義浩) 등 다양한 이명 및 가명으로 활동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를 담당하는 선우 스님은 “구국당의 별호에서 구할 구(救)자가 아니라 거북 구(龜)자를 쓰거나 이명, 가명이 많은 것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991년 6월 초월의 고향에는 ‘구국당 인영 백초월대선사 순국비’가 건립됐다.
초월은 20대 중반에 이미 대강백,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성인이었다. 그가 1915년에 불교계가 힘을 모아 개교한 중앙학림 초대 강사로 내정됐을 정도다. 요즘으로 치면 학장이나 다름없는 역할이었다. 영원사 역대 조실(祖室·사찰의 큰스님)을 총정리한 ‘조실안록(祖室案錄)’에 따르면 초월은 1903년 겨울∼1904년 초 영원사 조실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미치광이 행세로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피한 얘기는 유명하다. 동학사 강사 시절 초월은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며 참선했다. 일경이 그의 방에 들이닥치면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거북이 노래를 불렀다.
초월은 그를 따르는 학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강렬하게 고취시켰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라는 말은 독립운동에 나설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시 가담하라는 의미였다.
1938년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초월은 2년 6개월 판결을 받았고, 다시 독립운동 자금 때문에 감옥에 갇혀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만해가 입적한 날과 같다. 초월에게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광식 교수는 “만해와 용성을 따라가다 보면 초월을 만날 수밖에 없다”라며 “초월은 20여 년간 체포와 투옥, 구금, 감시에도 항일운동 일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독립기념관이 1989년 발행한 ‘항일 의열투쟁사’는 “불교계 승려들의 독립투쟁 가운데서도 백초월은 한용운 백용성의 활동에 뒤지지 않는 존재다. 항일 독립운동에 걸출한 활동을 하다 옥사 순국한 세 사람의 의열사를 들 때 신채호 김동삼과 함께 백초월을 넣는 이도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초월과 인연이 있는 경남 고성과 함양군, 서울 은평구 등 3개 지자체가 합동으로 스님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관사 초입부터 사찰까지 약 1km의 백초월길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진관사는 지금보다 훨씬 깊은 산중에 있었을 것이다. 초월은 그 숲길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항일 독립의 불꽃을 피웠을 것이다. 일경에 연행돼 고문 받을 당시 남겼다는 그의 일갈이 떠오른다. “이놈아 밥을 치면 떡밖에 더 되겠느냐. 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란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 … 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