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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북-미 정상회담장에 태극기가 없다”

입력 | 2019-01-24 03:00:00


박용 뉴욕 특파원

“트럼프(대통령)와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을 때 미국과 북한 깃발이 여기저기 내걸렸다. 당연히 한국 깃발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16선 중진 의원인 엘리엇 엥걸 신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민주·뉴욕)은 13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렸던 국회 한미동맹 강화사절단 소속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난해 6월 진행된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속내를 털어놨다. 엥걸 의원은 30년 넘게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한 베테랑 외교통이다. 그런 그가 북-미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 태극기가 걸릴 상황이 아니란 걸 모를 리 없다.

간담회가 끝난 뒤 진의를 물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은 한국이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하지 않는다면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는 특권을 누려선 안 된다”고 대답했다.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속도를 내는 북-미 관계와 소원해진 한미 동맹에 대한 걱정을 한꺼번에 털어놨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 의회 내부의 불편한 기류가 느껴졌다.

지난해 북-미 정상회담 석 달 후 북한은 정권 수립 70주년(9·9절)을 기념해 평양에서 연 열병식에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수위를 낮춘 북한 열병식을 주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생큐! 김 위원장”이라고 반색했다.

하지만 이날 열병식에 등장한 자주포는 다른 얘길 하고 있었다. 자주포의 포신 밑 차체엔 “조선 인민의 철천지원쑤 미제 침략자를 소멸하라”라는 격문이 적혀 있었다. 지구에서 “미국을 소멸하겠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나라는 몇 안 되는 핵보유국밖에 없다. 북-미 정상이 손을 맞잡았지만 북한이 보기에 미국은 여전히 소멸시켜야 할 침략자라는 인식을 핵과 미사일 실물 대신 ‘글’로 과시한 것이다.

이런 북한을 상대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껄끄러운 비핵화보다 미국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인 ICBM 폐기에 협상의 초점을 맞추고, 대북 제재 완화나 종전선언 등의 상응 조치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워싱턴 조야에서 커지고 있다. 주한미군을 미국의 방위비 절감과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협상의 지렛대로 쓸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백악관은 20일 트럼프 대통령 집권 2년간 성과를 발표하면서 ‘해외에서 미국 리더십 회복’ 항목의 첫 번째 사례로 북-미 정상회담 성과를 언급했다. 한미 동맹이 흔들린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3년차 성과에는 “대통령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없앴다. 한국의 방위비 지출을 늘리고 동맹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했다”는 대목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서, 북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대화는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이해당사자인 한국인의 지지 없이 북-미의 일방적인 이해관계만으로 대화가 성공할 수 없다. 굳건한 한미 동맹 없이는 북한의 비핵화를 완성하기도 어렵다.

엥걸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의 충실하고 믿음직한 동맹이었으며 우리는 한국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정책을 조정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한국과 적절한 협의를 하지 않고 그냥 홀로 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