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 산업2부장
명쾌함은 주최 측에도 가 닿았던 모양이다. 홍남기 부총리는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즉석에서 화답했고, 대통령은 빨리 고칠 수 있는 행정명령에서 먼저 노력해보자며 적극적이었다.
사실, 규제 입증의 책임을 공무원에게 지우는 일은 그 크기와 무게가 작거나 가볍지 않다. 정반대 관점으로 옮겨진 프레임에 맞춰 실행 계획을 세운다는 건 사실 모든 걸 뒤집어엎는 일에 견줘진다. 대통령과 부총리의 반응,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후속 조치를 추적해야 했다.
정부는 기존의 틀을 답습하는 중이다. 사실 공무원에게 규제 입증 책임을 묻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게 아니다. 행정규제기본법에 의해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는 규제 신설이나 강화 때 부처에 규제 필요성의 입증을 요구한다. 같은 법에 있는 ‘규제 일몰제’에 의해 기한이 다 된 기존 규제를 심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나 규제개혁신문고를 거친 안건을 심사할 때도 같은 절차가 있다. 이번에 달라진 점은 제도를 확대해 각 부처에도 ‘기존규제 정비위원회’를 두겠다는 것이다.
공무원의 규제 입증 책임 제도가 있음에도 대통령에게 ‘용감한 요청’을 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곤 하는 것은 제도의 운용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이종태 퍼시스 회장의 말에 좋은 아이디어라고 적극 나섰던 것으로 볼 때 그날 대통령과 부총리의 머릿속에도 기존 제도는 존재 가치가 미미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에는 지혜라는 게 있다. 저울 없이 빵을 두 쪽으로 공정하게 나누는 비법도 그런 유다. 한 사람은 빵을 손으로 쪼개는 역할만 하고, 나머지 사람에게 선택권만 먼저 주면 공정성 시비가 없다. 쾌도난마(快刀亂麻)식 묘수다.
이 회장이 대통령 앞에서 언급했던 1995년 교육부의 규제 개혁 사례는 그나마 최소한의 과감함이 있었다. 폐기 대상을 교육부가 제정한 전체 행정명령으로 삼았다. 기한 내에 필요성을 입증 못하면 무조건 폐기했다. 총 5332건 중 이렇게 해서 2639건이 없어졌다. 학교 내 자동판매기 설치 금지, 학생 자가용 승차 등교 금지 등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규제가 이때야 없어졌다.
규제 폐지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자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정부가 추진 중인 규제 폐지 조치는 더 과감해져야 한다. 규제 정도를 달리한 여러 대안은 정부가 신중하게 만들고 선택권은 민간에게 전적으로 줘서라도 말이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