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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최대 1조3000억원 벌금 뒤엔… 부산지검의 ‘밀반송 法網’

입력 | 2019-01-26 03:00:00

[위클리 리포트]‘홍콩∼한국∼일본’ 3국 중계 금괴밀수 국내 첫 처벌 뒷얘기




윤모 씨 일당이 홍콩에서 구입한 1kg짜리 금괴 뭉텅이를 쌓아두고 찍은 ‘인증샷’. 이들이 e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금괴 구입 인증 사진을 검찰이 확보한 것이다. 부산지검 제공

《홍콩에서 비행기를 탄 A 씨가 금괴를 가득 담은 가방을 들고 한국 공항에 내려 환승구역으로 향한다. 한국을 환승지로만 삼으면 세관 검사를 안 받는다. A 씨는 면세점과 출국 게이트가 있는 환승구역에서 일본으로 가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만나 몰래 금괴를 나눠준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여행객들은 금괴 5, 6개씩을 몸에 숨기고 일본행 비행기를 탄다. 인천, 김해 등 한국 국제공항에선 이런 방식으로 하루 평균 200여 개의 금괴가 오간다. 홍콩 금괴가 한국 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밀수는 수년간 공공연히 이뤄져왔다. 하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부산지방검찰청 외사부 검사들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됐다.》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죠.”

지난해 3월 14일 오전 7시. 부산지검 외사부 수사관들이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고급빌라 현관문을 두드렸다. 홍콩에서 금괴를 산 뒤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밀수하는 조직의 총책 윤모 씨(55) 집이었다. 초인종을 대여섯 번 누르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안방에 들어가 보니 검은 가방 2개가 놓여 있었다. 가방엔 5만 원권 현금이 가득했다. 수사관들은 돈을 세기 시작했다. 전부 11억 원이었다.

‘이게 전부일까?’ 신입이었던 신연주 수사관(29·여)에겐 뭔가 좀 이상하다는 ‘촉’이 왔다. 집안 곳곳을 뒤지던 신 수사관은 윤 씨 자녀 방 옷장에서 여행가방 7개를 찾았다. 열어보니 한화 9억 원, 미화 359만 달러(약 40억5000만 원), 엔화 4억 엔(약 41억1500만 원) 등 현금 90억 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안방에 있던 검은 가방 2개는 추가 수색을 막기 위해 던져 놓은 미끼였던 것이다. 윤 씨 집에서 발견된 101억 원과 공범들 집에서 압수한 현금을 더하면 총 128억 원. 검찰이 단일 사건에서 현금으로 환수한 역대 최대 범죄수익금이었다.


○ 집단지성이 만든 ‘밀반송’ 법리

검찰이 지난해 3월 14일 홍콩 금괴 밀수조직 총책 윤모 씨의 서울 청담동 고급빌라 옷장에 쌓인 가방 7개에서 발견한 현금 다발. 부산지검 제공 

윤 씨 일당은 홍콩에서 금괴를 구입해 한국 공항 환승구역을 거쳐 일본으로 밀수하는 수법으로 막대한 돈을 만졌다. 홍콩에선 0%인 금괴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가 일본에선 8%인 점을 노려 밀수로 차익을 챙기는 구조다. 일본이 2014년에 소비세를 5%에서 8%로 인상하면서 본격화된 수법이다. 윤 씨 일당은 2015년 7월∼2016년 12월 홍콩 금괴 4만 개(2조 원 상당)를 일본으로 밀수해 400억 원이 넘는 차익을 거뒀다.

홍콩 금괴가 한국 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밀수된다는 건 수년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밀수 조직은 중간에 한국을 거쳐 금괴의 출발지를 홍콩이 아닌 한국으로 세탁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세관 검사를 피했다. 일본이 한국인 관광객에겐 세관 검사를 느슨하게 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한국 관세당국은 한국에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며 손을 쓰지 않아 윤 씨는 밀수로 수백억 원을 벌 수 있었다.

윤 씨에 대한 수사는 2017년 7월 김상균 당시 부산지검 외사부 검사(46·현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 검사)가 경찰이 송치한 서류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2016년 가을부터 윤 씨 일당 중 일부가 연루된 홍콩발 일본행 금괴 밀수 사건을 수사하다가 무혐의로 결론내고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금괴가 한국에서 통관 절차 없이 환승구역만 거쳐 일본으로 가기 때문에 법리상으로는 한국으로의 밀수가 아니어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사람이 홍콩에서 산 금괴가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밀수되는데 한국에선 처벌할 수 없다?’ 이상하다고 여긴 김 검사는 한 달간 관세법에 매달렸다. 그동안 이런 사건을 수사한 적이 없어 판례도 없었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장을 지냈던 권순철 당시 부산지검 2차장검사(50·현 서울동부지검 차장검사)는 해외에 유사 사건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영문 판례까지 뒤졌지만 역시 없었다.

김 검사는 유죄를 입증할 새 법리를 만들었다. 조대호 당시 부산지검 외사부장(46·현 인천지검 특수부장)이 허점을 채워나갔다. 이 법리는 외사부 검사들의 토론장에 올랐다. 조 부장은 “부장 말은 다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라”며 토론을 주도했다. 박성진 검사(37)와 이소연 검사(38·여·현 서울중앙지검 검사)는 ‘악마의 변호인’을 자처하며 치열하게 다퉜다. 3개월간의 토론 끝에 외사부 검사들은 유죄 판결을 확신할 정도로 법리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검사들이 완성한 법리는 이랬다. 홍콩에서 구입한 금괴가 한국 공항 환승구역으로 들어왔다가 일본에서 판매되는 형태라면 사실상 중계무역이어서 관세법상 반송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를 어기고 ‘밀반송’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관세범죄 수사는 밀수에만 집중돼 밀반송 범죄를 다룬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김 검사는 “관세청에서도 밀반송 사건을 생소해했던 만큼 이례적인 법리였다”고 말했다.


○ ‘공짜 여행’에 혹했다 5세 딸과 생이별

수사팀은 지난해 1월부터 홍콩∼한국∼일본을 거치는 금괴 밀수 조직의 e메일과 문자메시지 교신 내역 등을 은밀히 추적했다. 조직 총책인 윤 씨의 존재와 조직 규모, 금괴 거래 내역이 담긴 장부, 운반책으로 동원된 한국인 여행객 명단이 나왔다. 밀수된 금괴는 1년 반 동안 2조 원어치가 넘었다. 밀수에 동원된 여행객은 2016년에만 5000명 이상이었다.

운반책들은 ‘간단한 심부름만 해주면 공짜여행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쉽게 넘어갔다. 윤 씨 일당은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를 통해 ‘항공권과 호텔비를 대주고 수고비로 10만∼20만 원을 더 주겠다’며 금괴를 운반할 여행객을 모았다. 처음에는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모집하다가 밀수 규모가 커지자 외부인까지 물색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의심을 피하려고 주로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이나 여성 일행들을 운반책으로 골랐다.

운반책을 맡은 여행객들은 홍콩에서 금괴를 들고 온 윤 씨 일당과 한국 공항 환승구역에서 접선했다. 면세점이나 화장실 등에서 금괴를 받은 뒤 비행기에 올라 일본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 씨 일당에게 전달했다. 간혹 운반책이 금괴를 들고 나가다 적발되면 윤 씨 일당이 벌금 수천만 원을 대신 내줬다.

윤 씨 일당은 금괴 배달사고를 우려해 운반책의 신원을 상세히 기록했다. 출국 당일엔 운반책의 전신사진까지 찍어 일본 공항에서 기다리는 금괴 회수책에게 보냈다. 운반책이 금괴를 들고 도망가면 한국 경찰에 고소했다. 고소를 당한 운반책은 특수절도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았지만 정작 밀수 주범인 윤 씨 일당은 법망을 피해갔다.

윤 씨 일당이 체포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2월 초 김해공항에서 일본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탔던 한국인 12명이 후쿠오카 공항에서 금괴 36kg을 밀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B 씨(34) 부부가 구속되자 혼자 남겨진 다섯 살배기 딸은 한국에 있던 할머니가 황급히 일본으로 가 데려왔다. 딸과 생이별한 부부는 일본 감옥에 갇혀 있다 석 달 만에 풀려났다. 부부는 수사팀에 “단순 알바로 생각했다가 신세를 망쳤다”며 많이 괴로워했다고 한다.


○ 역대 최초 유죄 판결, 역대 최대 벌금

윤 씨 일당의 범행으로 한국인이 일본에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영대 당시 부산지검장(56·현 서울북부지검장)은 수사팀을 독려했다. 김상균 이소연 검사가 부산지검을 떠났고 하동우 검사(44·현 해외불법재산 환수 합동조사단 부부장검사)와 주혜진 검사(42·여)가 부임하면서 수사팀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수사팀은 관세청 국세청과의 공조가 수사 성공의 열쇠라고 판단했다. 하 부부장은 관세청을 찾아가 실무진과 공조 방안을 협의했다. 검사 출신이었던 김영문 관세청장(54)은 친정의 수사에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검찰이 윤 씨 일당의 금괴 밀수를 전담하고, 관세청은 윤 씨 일당이 금괴 밀수 수익을 국내로 들여오는 과정을 맡기로 했다. 국세청은 윤 씨 일당의 밀수 수익에 대한 소득세 포탈을 조사하기로 했다.

수사팀은 지난해 3월 14일 윤 씨를 체포하고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윤 씨는 자신의 금괴 밀수가 한국에선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금괴를 홍콩에서 일본으로 옮기는 거래이고 한국은 환승지에 불과해 한국 세관에 신고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법리 토론을 거쳤던 수사팀은 윤 씨를 포함한 핵심 조직원 4명을 구속 기소하는 등 모두 11명을 재판에 넘겼다.

부산지법 형사5부(부장판사 최환)는 11일 윤 씨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조세범 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과 벌금 1조3338억 원, 추징금 2조102억 원을 선고했다. 개인에게 부과된 역대 최대 벌금이고, 분식회계로 23조 원을 선고받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추징금이다. 운반총괄 양모 씨(47)에게는 징역 2년 6개월과 벌금 1조3247억 원, 추징금 2조102억 원이 선고됐다.

벌금 액수는 윤 씨가 밀수한 금괴 원가에 포탈 세액의 2배를 더한 것이다. 윤 씨가 밀수한 금괴 원가는 1조3248억 원이고 빼돌린 세금의 2배가 90억 원이었다. 추징금은 밀수한 금괴의 시세로 정해지는데 시세 5000만 원짜리 금괴 4만여 개를 밀수한 윤 씨에겐 2조 원 대의 추징금이 부과됐다. 윤 씨 일당이 범죄로 거둔 수익은 모두 합쳐 400억 원 남짓이지만 벌금과 추징금 산정 기준에 따르면 이렇게 판결해야 한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윤 씨가 1조3000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내지 못 하면 강제노역을 해야 한다. 형법상 강제노역은 최대 1000일까지만 할 수 있다. 윤 씨는 하루 일당 13억 원짜리 ‘황제 노역’을 하게 되는 셈이다. 윤 씨는 징역 5년의 형기를 마쳐도 강제노역을 하느라 1000일 더 수감될 가능성이 높다. 출소 후라도 수입이 생긴다면 추징금으로 내야 한다.

지난해 5월 수사팀이 윤 씨 일당을 기소하자 유사 사건을 다루던 전국 지방경찰청 네다섯 곳에서 문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윤 씨 일당처럼 한국을 경유지 삼아 홍콩 금괴를 외국으로 밀수하는 범죄가 적지 않다는 방증이다.

부산지검 외사부는 홍콩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금괴 밀수를 한국에서 처음 처벌하는 사례를 이끌어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에선 윤 씨 일당과 같은 수법을 쓴 밀수 조직에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마다 판단이 다른 만큼 윤 씨 일당 사건도 2심 재판에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동호 부산지검 외사부장(49)은 “이번 사건의 유죄 판결을 확정지어야 평범한 국민을 전과자로 만드는 밀수 범죄를 끊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