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원 넘게 써야 하는데 서울에 가도 될까.’
경남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는 40대 안모 씨(여)는 지난해 11월 서울행 고속버스 표를 끊으며 한참 고민했다. 서민금융박람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터미널에 갔지만 버스비는 안 씨에게 큰 돈이었다.
그가 박람회에 가게 된 건 ‘일수 이자’ 때문이었다. 조선업 불황으로 장사가 안 돼 가게 유지비조차 안 나오자 1년 전 사채를 빌려 쓴 게 화근이었다. 원금 500만 원이 이자를 합쳐 2000만 원으로 불었다. 가게 하루 매출이 약 20만 원인데 일수로 15만 원을 내고 나면 생활비조차 부족했다. 얼마 전 빚 독촉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고등학생 두 아들 때문에 마음을 다잡던 참이었다. 안 씨는 “하루하루 불어나는 일수 이자가 숨통을 조였다. 악순환을 끊고 싶었지만 창원엔 상담하고 구제방법을 물어볼 곳이 없었다”고 했다.
경남 창원과 거제, 전북 군산과 전남 목포 등 조선업 등의 몰락으로 고용·산업위기지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서민들이 불법 사금융을 이용하다 경기 악화에 이은 2차 피해를 겪고 있다. 사채업자들은 경기침체와 실업난 속에 생활비가 급해진 청년, 자영업자들에게 주로 손을 뻗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불법 사금융 사건 처리를 위해 대부금융협회에 금리 확인을 요청한 사례가 호남·제주권의 경우 2015년 8건에서 지난해에는 38건으로 늘어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이 중 조선업과 자동차업이 동시에 몰락한 군산에서만 17건이 발생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군산·목포=김형민기자 kalssam35@donga.com
군산·목포=김형민기자 kalssam35@donga.com
▼ 고용재난 서민 좀먹는 불법 사금융▼
24일 전북 군산시 오식도동의 먹자골목. 점심시간이지만 식당들 대부분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그나마 인근 공장과 점심식사 계약을 맺은 몇 곳에서만 작업복을 입은 공장 직원들이 보였다. 이곳에 건물을 갖고 있는 김모 씨(53)는 “세입자인 자영업자들이 은행에서 대출이 안 돼 사채를 쓸 수밖에 없다. 내가 대신 수도요금을 내주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공단이 있는 오식도동 먹자골목은 현대중공업, 한국GM 직원들이 점심, 저녁마다 몰려드는 곳이었다. 식당 370여 개가 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3년 전 가동을 멈추고 한국GM 군산공장마저 지난해 폐쇄되자 이곳 식당들의 매출이 크게 줄었다. 가게가 문을 닫기 시작하자 3년 전 100만 원이 넘던 월세(옛 30평 기준)가 요즘엔 30만 원대로 떨어졌다. 오식도동 인근 비응항에서 건어물을 파는 김성도 씨(55)는 “공단 인근 식당 사장들이 사채를 쓴단 얘기가 파다하다. 그런 가게는 3개월을 못 버티고 문을 닫는다”고 했다.
군산이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 들면서 자영업자를 포함한 지역 주민들이 생활비 등 급한 불을 끄려 불법 사금융에 빠져 들고 있다. 한국대부금융협회에 따르면 군산경찰서가 이자계산을 요청한 대부업·사금융 사건은 2015~2017년에는 한 건도 없었는데 지난해엔 17건 발생했다. 경찰은 불법 사금융 사건을 처리할 때 외부에 연리가 얼마인지 계산을 요청한다. 군산경찰서 관계자는 “지역경제가 많이 안 좋아 사채 피해가 많아졌다. 검찰도 사채업자의 이자율 확인은 특별히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하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금융당국이 최근 시중은행은 물론 상호금융권까지 대출규제를 강화하자 제도권 밖 사금융으로 밀려나는 서민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군산시 월명신협 관계자는 “이달 말 한국GM 군산공장 실직자들의 실업급여가 종료되면 사금융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늘 것”이라고 했다. 전북신용보증재단 군산시점 이진영 대리는 “지난해 대출보증 실적이 전년에 비해 53%가량 늘었다”며 “작년에 보증을 받았던 사람들이 돈이 떨어지자 또 오고 있는데, 재원이 부족해 지원을 못하니 안타깝다. 이곳에서마저 거절당한 사람들은 사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채업자는 생계가 급한 서민에게 ‘돈 잘 빌려주는 이웃’으로 선량하게 접근했다가 연체가 생기면 철거머리처럼 악독하게 상환을 요구하는 고리대금업자로 변한다. 군산 소룡동에서 횟집을 운영했던 장모 씨(55)는 지난해 자녀 학자금이 급해 다른 가게 사장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그 사람은 600만 원을 내주는 조건으로 연리 200%를 요구했다. 기존 대출금 때문에 제도권 금융회사를 이용하지 못했던 장 씨는 ‘설마 금방 갚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돈을 건네받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기업들이 떠나가면서 영업여건이 갈수록 악화되자 사채이자로만 1년에 12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횟집을 팔아 다른 빚을 우선 갚은 장 씨는 경찰에 사채업자를 신고했다. 사채업자는 장 씨에게 “내가 감옥에 가도 돈을 빌린 건 민사사건이니 끝까지 돈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경남 창원시에서 직장을 구하던 강모 씨(35)는 지역신문에서 ‘법정 이자율로 대출해준다’는 광고를 보고 사채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생활비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명목으로 실제 이자율은 연 30%로 법정최고이율(24%)보다 높았다. 빚독촉에 쫓기던 강 씨는 그해 11월 경찰에 사체업체를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채업자들은 대포통장에 대포전화를 쓰니 수사하기 복잡하다”며 수사를 회피했다. 강 씨는 “대통령은 불법 사금융 단속을 강화하라고 하는데, 경찰들이 서로 다른 경찰서로 가라고 미루는 게 말이 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직 사채업자인 40대 고모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휴대전화 20개를 쓰는 업자도 있다. 경찰이 정기적으로 단속을 하지만 점조직처럼 활동하는 사채업자들을 절대 제대로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서민들이 사금융 구제책을 상담할 곳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지방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는 서민들이 줄을 서서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다. 공현배 거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장은 “요즘 거제에선 사람들이 신용회복 신청을 해도 면담을 받으려면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한다. 신청자들이 폭증하고 있다”고 했다. 전남 군산시의 자영업자 이모 씨(65)는 “그간 서민금융상품이 뭐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며 “진작 알았으면 고생을 덜 했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대부업체 법정최고금리가 계속 낮아지면서 저신용자들이 대부업체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해 불법 사금융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군산·목포=김형민기자 kalssam35@donga.com
장윤정기자 yunjung@donga.com
장윤정기자 yunjung@donga.com
▼ 저신용자 위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
조선업, 자동차 산업의 불황으로 직격탄을 맞은 지역경제가 불법 사금융 위기에 내몰리면서 지금까지 정부 서민금융정책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1년에 한두 차례씩 서민 금융지원 체제를 손보고 있지만 신용등급 7~10등급의 저신용자를 위한 정책과 재원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8년 햇살론, 미소금융 등 정책금융상품을 내놓은 이후 지난해까지 총 37조 원을 공급했다. 작년에도 약 7조 원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정책상품은 신용등급 6등급 이상 위주로 제공됐다. 금융위에 따르면 햇살론, 미소금융, 바꿔드림론, 새희망홀씨 등 4대 서민금융상품 이용자 중 61.9%가 신용등급 6등급 이상이었다. 서민금융 이용자 중 제도권 금융을 이용할 수 없는 8등급 이하는 전체의 9.2%에 불과했다.
금융위도 이런 문제점을 반영해 지난해 말 서민금융체계를 개편했다. 7등급 이하 저신용자에게 연 10% 중후반대의 금리로 연간 약 1조 원을 공급해 생계·대환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민금융 전문가들은 연간 1조 원 규모로는 불법 사금융에 내몰린 이들을 구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금융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현재 불법 사금융 이용자는 52만 명으로, 이들의 채무 규모는 6조8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저신용자를 불법 사금융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자금지원과 함께 이들의 재기를 돕기 위한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장은 “그동안 정부의 서민금융정책은 양적 확대에 집중한 면이 크다”며 “저신용자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도 같이 제시돼야 한다”고 했다.
군산·목포=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