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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20〉자급자족하는 아빠, 타급자족하는 아들

입력 | 2019-01-29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중학교 2학년인 내 아들은 유튜브에 기타리스트 우상이 있다. 무엇이든 그를 따라 한다. 그와 같은 상표의 기타를 가지고 같은 머리띠를 매고 그와 똑같은 포즈, 고개를 갸웃이 하고 날마다 핑거스타일(손끝으로 현을 뽑아서 치는 방식) 기타를 친다.

“엄마, 이 티셔츠랑 바지 어때? 이거 정말 가지고 싶다.”

그 우상이 입고 있는 옷가지였다. 주문과 동시에 제작되는 것이었고 지구 위에 꼭 1000장만 한정으로 만든다고 했다. 당장 주문하지 않으면 금방 바닥날 것이라며 안절부절못했다.

“꼭 사고 싶으면 한국에서 사. 더 좋은 걸 더 싸게 살 수 있어.”

아빠 레돔의 말이었다. 그의 단호함에 아들과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향이며 그것은 비싸다, 싸다 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이건 취향 이야기가 아니야. 당신은 그 셔츠가 정말 미국에서 온다고 생각해? 아마 목화는 카자흐스탄에서 농사지은 것일 테고, 그 솜은 베트남으로 가서 천이 되었겠지. 그 천은 다시 방글라데시 제조 공장에 가서 미성년자들이 돌리는 미싱 아래서 옷이 되었겠지. 거기서 끝이냐? 이 옷은 이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겠지. 여기서 끝이냐? 이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야겠지…. 한 장의 셔츠를 주문하는 순간 각 나라를 옮겨 다닐 때마다 드는 비용과 발생되는 공해들을 생각해 봤어? 꼭 필요하면 한국에서 사.”

그는 그런 멍청한 짓을 꼭 해야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렇지만 상표가 다르잖아. 난 유일무이한 그 상표를 원해.”

아들의 표정은 간절했지만 레돔은 들은 척도 않고 독서삼매경으로 들어갔다. ‘자급자족의 방법’이란 책이었다. 우리가 한국으로 올 때 시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아무것도 구할 수 없을 때 이 책을 보고 궁리해 보라고 준 것 같았다. 거기에는 자급자족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아궁이를 만들어 빵을 굽는 법, 훈제실을 만들어 소시지를 만드는 법,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드는 법, 흐르는 물에 물고기를 키워서 훈제하는 법, 발효되는 건초 더미에서 발생하는 열을 이용해 난방과 더운 물을 만드는 법…. 무인도에 가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는 책이었다.

“아빠는 왜 농부가 되었어. 그냥 엔지니어일 때가 더 좋았어.”

아들이 자급자족의 방법을 뺏어 버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겨울 포도밭에서 가지치기 할 때야. 땅을 밟고 포도나무를 만지는 그 순간은 말할 수 없이 편안해. 하루 종일 밭에 있어도 피곤한 줄을 몰라. 그런데 이게 뭐야…. 요즘엔 숨을 쉴 수 없으니 밖에서 일할 수가 없어. 죽을 것 같다고. 그런데도 필요도 없는 셔츠 만들기를 계속해야겠어? 정말이지….”

먼지 때문에 바깥에서 일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자 농부는 절망했다.

“최소한의 것만 만들어야 한다고. 지구는 지금 개발이라는 암에 걸렸어.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 올 거야. 최소한 지역의 농산물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 그러면 적어도 이동할 때 생기는 자동차 공해는 막을 수 있잖아. 누가 만든 것인지 아니까 농부는 신경 써서 농사를 지을 거야. 그러면 땅도 살아나고 물도 맑아지고….”

환경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아들은 관심도 없다.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셔츠 노래만 부른다. 결국 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넘어가 후다닥 ‘결제 완료키’를 ‘탁’ 쳐버리고 만다. 어디선가 트럭 가득 실린 목화솜이 붕붕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아들의 미래에 재앙이 되는 짓을 한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지 모르는 레돔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밭에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벌들이 무사한지도 궁금하고….”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