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의 조수 ‘켄’을 연기한 박정복(왼쪽), 김도빈. 두 배우는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닿도록 늘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연극 ‘레드’에서 마크 로스코(1903∼1970)의 화실에 조수로 고용된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35), 김도빈(37)에게 무대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로스코 역은 강신일, 정보석이 맡고 있다. 김도빈은 “스승이 ‘네 인생은 저 밖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울컥하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스승을 따르면서도 때론 발칙하게 도발하는 캐릭터 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24일 박정복, 김도빈을 만났다.
6일 개막한 후 인기몰이 중인 ‘레드’는 1958년 로스코가 뉴욕 시그램 빌딩 안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40여 점을 의뢰받은 뒤 돌연 계약을 파기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압도적인 대사량과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2인극이다. 켄은 가상의 인물로 극중 로스코는 ‘팝 아트’라는 새로운 화풍이 주목받자 본인이 이룬 추상화의 위상이 무너지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번뇌한다.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화가 로스코가 켄과 대화하고 팽팽히 맞서며 토론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번에 처음 만난 두 배우는 로스코와의 관계 설정이 가장 어렵다고 설명했다. 둘은 틈 날 때마다 배역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 자주 통화한다.
“어제도 극 후반부 4장에 대해 논의했어요. 스승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직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항상 어려워요. 단순한 대사일 수도 있지만 애증을 담아 연기해야 하거든요”(김도빈)
“스승에 대한 존경과 증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정보석, 강신일 선배로부터 ‘오늘은 좀 무섭더라. 날 죽일 것 같았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만큼 감정선이 미묘하죠.”(박정복)
관객은 쉼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양에 놀라지만, 정작 힘든 장면은 따로 있단다. 김도빈은 “거대한 캔버스를 붉은색으로 칠하는 장면에서 팔과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붓질을 하는 게 진짜 어렵다”며 “농도에 따라 물감이 따귀를 때리듯 얼굴을 덮칠 때도 있고 입에 들어갈 때도 많다”고 했다. 그는 “관객이 이 힘든 장면을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며 웃었다. 박정복 역시 “처음엔 팔 한쪽만 사용했는데, 붓질하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안 뒤부터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 장면에서는 두 배우의 거친 숨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