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행복원정대:워라밸을 찾아서]3부 해외에서 만난 ‘워라밸 보석’ <3>덴마크 직장인은 오늘도 ‘휘게(편안함)’한다
덴마크의 워킹대디 토마스 옌센 씨가 지난해 10월 30일 오후 3시경 덴마크 스뫼룸시의 직장에서 퇴근하고 있다(위쪽 사진). 그가 향한 곳은 세 살배기 아들(아래 사진 앞쪽)이 다니는 어린이집. 덴마크에선 이처럼 직장인 아빠가 오후 3∼4시경 퇴근해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게 일상적이다. 스뫼룸=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지난해 10월 30일 덴마크 스뫼룸 시의 보청기 기업 오티콘에서 만난 토마스 옌센 씨(44)는 덴마크 직장인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다가 말을 멈췄다. 시계는 오후 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아이를 데리러 간다고?’ 어리둥절해하는 기자를 앞에 두고 옌센 씨와 그의 동료들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때 깨달았다. 워라밸 취재를 위해 제대로 찾아왔음을….
○ 오후 3시 반 ‘퇴근 러시아워’
옌센 씨를 따라 나서니 1시간 전만 해도 한산한 도로에 차량이 가득했다. 보육시설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가는 직장인들의 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덴마크 근로자 대다수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3, 4시에 퇴근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덴마크 임금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2016년 기준)은 1416시간으로 한국(2052시간)의 3분의 2 수준이다.
옌센 씨가 회사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민간 어린이집에 들어서자 세발자전거를 타던 세 살배기 아들이 달려와 안겼다. “오늘 뭐하고 놀았느냐”는 옌센 씨의 질문에 아이는 “핼러윈이라서 피망에 얼굴을 그렸다”고 했다. 옌센 씨 부부는 맞벌이다. 부부가 모두 늦게 퇴근하면 장모에게 아이를 부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한 해 동안 서너 번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부가 모두 늦게 퇴근할 때가 거의 없단 얘기다.
○ “직원이 출퇴근시간 정하면 충성도 높아져”
오티콘사의 글로벌 프로그램 매니저인 키르스텐 슈미트 씨(50·여)는 시차 때문에 저녁에 해외 파트너와 화상회의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자기가 원하는 날 대휴를 쓴다. 반대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 때문에 일찍 퇴근할 일이 생기면 필요할 때 초과근로를 한다. 상사가 일일이 근로시간을 세지 않는다. 슈미트 씨는 “근로자에게 업무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재량을 주면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진다는 게 경영진의 오랜 믿음”이라고 말했다.
덴마크의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에서 일하는 이탈리아인 알라인 프로이에티 씨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덴마크처럼 워라밸을 중시하는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한 제약사에서 일할 땐 상사가 퇴근하기 전까지 부하직원들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한다.
몇 해 전 지금 일터로 옮긴 뒤로는 삶의 질이 달라졌다. 오후 4시면 퇴근해 여덟 살 아들과 공터에서 축구를 즐긴다. 그는 “‘내가 평생 아이와 이렇게 사이가 좋았던 적이 있나’ 싶다”며 “이곳에서 내가 만약 상사에게 ‘퇴근해도 되냐’로 물으면 아마 ‘내가 당신의 시간을 대신 관리해줄 수 없는데 그걸 왜 묻느냐’고 반문할 것”이라며 웃었다.
○ 덴마크 남성의 집안일 시간, 한국의 4배
노보노디스크의 부사장 메테 아트루프 씨(48·여)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녁을 자녀와 함께 먹는다. ‘저녁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 아트루프 씨가 ‘휘게’를 위해 다짐한 원칙이다. 의사인 남편과 육아를 평등하게 분담하고 저녁식사 준비도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트루프 씨는 “남편과 짐을 나누는 덕에 육아 부담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초등생 돌봄교실 참여율 OECD 1위▼
한국 12.5%… 평균치의 절반 수준
미취학 아동에 대한 정부의 보육 서비스는 한국이 덴마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선 어린이집 비용을 전액 정부가 대준다. 이용 시간도 원칙적으로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7시 반까지 하루 12시간이다.
덴마크에선 공립어린이집 비용이 월 평균 1만4892크로네(약 253만 원)에 이른다. 지방자치단체가 75%를 대준다고 해도 3723크로네(약 63만 원)를 부모가 부담해야 한다. 이용 시간도 오전 6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하루 10시간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돌봄 절벽’이 생긴다. 2017년 기준 국내 초등학생 267만 명 중 초등 돌봄교실 등 공적 돌봄 서비스를 이용한 어린이는 33만 명(12.5%)에 불과했다. 참여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8.4%)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반면 덴마크엔 이런 ‘돌봄 공백’이 없다. 초등학생의 돌봄 참여율이 63.5%(2016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1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학년(6∼8세)의 돌봄 참여율은 76.7%로 OECD 평균(34.1%)의 2배가 넘는다. 돌봄 교실에선 학업보다는 ‘사회적 교육’에 초점을 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보육교사인 ‘페다고’가 학급마다 1명씩 배정돼 아이들을 인솔하고 안전 관리를 책임진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정규 수업을 마친 후 해가 기울 때까지 학교에만 있는 건 아니다. 돌봄 참여 시간이 주당 평균 9시간 12분으로 OECD 평균(9시간 36분)보다도 짧기 때문이다. 즉, 직장 내 워라밸이 지켜지면서 정규 수업 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생기는 ‘돌봄 공백’이 그만큼 짧다는 의미다. 많은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이런 덴마크의 초등 돌봄 시스템을 참고해 국내 초등 돌봄 참여 학생을 2022년까지 53만 명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하루 4, 5시간에 불과한 정규수업 시간을 6, 7시간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덴마크는 2014년 교육 개혁을 통해 초등학교 저학년의 정규 수업종료 시간을 낮 12시 반에서 오후 2시로 늦췄다.
코펜하겐·스뫼룸=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