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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전성철]김복동 할머니

입력 | 2019-01-30 03:00:00


경남 양산이 고향인 김복동 할머니는 1940년 중국 광둥의 정신대로 끌려갔다. 면(面)에서 나온 사람은 “전쟁을 하는데 군복 만들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다. 안 가려고 버텼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추방할 것”이라 협박해 어쩔 수 없었다. 초경도 안 한 14세의 어린 소녀는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어머니는 “자식을 이래 만들어서, 저승 가서 조상을 어떻게 만나냐”고 자책하다 6년 만에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위안부 다녀온 죄’로 타향 부산에서 식당을 하며 숨어 살았다. 66세 때인 1992년 ‘수요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주 새벽 기차로 상경해 일본대사관을 향해 “다른 여자처럼 살 수 없게 맹글어 놓고. 날 좀 봐라”고 악을 썼다.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1993년 6월 유엔 세계인권대회도 찾아갔다. 김 할머니의 증언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대회 결의문에 ‘일본군 성노예 범죄 조사기구 설립’이 포함됐다. 일본 언론은 이를 ‘일본 외교의 수치’라 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자 김 할머니는 피해자를 돕는 모금에 참여했다. 2016년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강진이 일어났을 때도 앞장서서 구호성금을 냈다. 그는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다. 국가를 넘어 사람까지 미워하면 한일관계는 완전히 깨질 것”이라고 했다. 2012년에는 전시(戰時)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 설립에도 앞장섰다.

▷수요집회를 다녀온 날 밤이면, 김 할머니는 줄담배를 피웠다. 일본대사관은 집회 때마다 스무 개가 넘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그렇게 꽉 막힌 대사관을 보고 돌아오면 속이 시커메졌다. 28일 오후 10시 41분, 김 할머니는 영영 눈을 감았다. 약한 나라에 태어나 힘들었던 할머니, 원하던 사과 한마디를 끝내 못 들었다. 영결식은 다음 달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다. 수요집회를 외면했던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다. 저승에 가서도 듣고 싶은 그 한마디 “미안합니다”, 그거면 된다.
 
전성철 논설위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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