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2화>천안 아우내장터
100년 전 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선 남녀노소 30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우내장터 인근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 조성된 만세운동 조형물에선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위 사진은 2013년 천안시 병천면에서 재현된 봉화제 모습. 천안=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긔미 독립 운동 때 아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라. 긔미 삼월 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 국외 만세소리 서로 연하얏었다. 그 가운데도, 충남 목천 아내 장터일은 가장 장렬한 운동의 하나다. 그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만 노소남녀 스므 분이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장터가 내려다보이는 구미산에 세워진 기미독립만세기념비에 새겨진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비문은 국학자 정인보 선생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 선생이 썼다. ‘아내’는 아우내의 옛말이다. 2개의 내(개천)를 아우른다는 뜻이고, 이곳의 지명인 병천(倂川)을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기도 하다. 경상도와 한양 땅을 이어주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 전국 곳곳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큰 장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100년 전 음력 3월 1일(1919년 4월 1일)에도 이곳은 3000여 명의 인파로 북적였다. 전날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진천 고갯마루에 봉화 횃불이 올려져 거사를 알린 터였다.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이 벌어질 참이었다.
○ 아우내장터의 영웅들
①오후 1시께 3000여 명의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누비는 큰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주재소의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해 오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또 천안에서 헌병과 수비대가 급히 출동하여 발포와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
②오후 4시께 격한 군중이 사망자의 시체를 주재소에 운반하여 갖가지 항의를 제출, 일부는 투석도 하고 철조망도 파괴하며, 소방기구도 마구 흩어 주재소장을 혼내 주었는데, 적은 발포로 응수하였다.
③그 후 군중은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여 천안과 병천 간의 전선을 절단하고 면사무소와 우편소에서도 운동을 벌였다.
‘독립운동사’가 아우내장터의 시위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은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으로 꼽히는 규모뿐 아니라 뛰어난 응집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안군에서는 앞서 목천면 보통학교 학생 120명의 의거(3월 14일), 입장면 입장시장 군중 700여 명의 시위(3월 20일), 입장면 양대시장에서 광부 200여 명과 일제 헌병 간의 충돌(3월 28일), 천안면 3000여 명 군중의 만세운동(3월 29일) 등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17세 여학생 유관순이 고향 천안 동면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제안했을 때 동리 어른들이 즉각 호응할 만큼 천안 곳곳의 시위 바람은 거셌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동면 지렁이골의 만세운동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되었는지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조병호(1903∼1973)의 증언을 통해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신동아 1965년 3월호·조병호 ‘유관순과 병천 장날’) 조병호의 부친으로 동면의 어른이었던 조인원(1865∼1931)이 아우내장터에서 각각 천안, 수신, 진천과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의 책임자를 지명했고, 열여섯 살 조병호와 스물한 살 조만형, 스물일곱 살 박봉래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밤에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예배당에 모여 태극기를 그리면서 교제를 나눴다. 지도자급 인사였던 이백하(1899∼1985)와 조인원은 음력 2월 그믐날엔 천안 길목과 진천 고갯마루, 수신면 산마루에 횃불을 놓아 다음 날의 거사를 알리도록 계획했다.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봉화제’였다. “병천장터에 주둔해 있던 야마모토 등 네 놈의 일본 헌병은 전혀 이 움직임을 알지 못한 듯했다”라고 조병호가 회고할 만큼 시위대의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날이 밝아왔다”.
○ “망국의 한과 항일의 염이 있을 것이니”
오롯이 동면 사람들만 만세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앞두고 인근 각 면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수신면 김교선(1892∼1970)도 그중 한 명이었다. 스물일곱 살 농군이었던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3월 말이 돼서야 마을 친구인 이순구(1892∼1950)에게서 전해 들었다. 수신면민을 동원해서 전국에서 일어나는 항일운동에 호응해야겠다고 이순구와 뜻을 모은 김교선은 마을 유지인 박영학(1878∼1920)을 찾아가 상의한 뒤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한다. 그는 마음 맞는 동지 몇을 모아 마을 뒷산에 횃불을 올려놓고 무턱대고 독립만세를 불렀다.(김남석 등 지음·‘충남의 독립운동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수신면 발산리의 횃불이 자정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고 타오르자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횃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도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새벽까지 횃불을 올리면서 만세를 부른 뒤 김교선은 다음 단계의 일을 구상하고자 수신면 복다회리의 어른 김상훈(1874∼1925)을 찾아갔다. 그는 김상훈에게서 “병천 쪽에서도 한창 일을 꾸미고 있으니 합류하기로 하지”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튿날 병천의 연락원에게서 간단히 쓰인 쪽지 한 장을 받는다. “3월 1일(음력) 장날을 이용하여 아내(아우내)장터에 모여 거사키로 작정했다.”(신동아 1965년 3월호·김교선 ‘수신면민을 동원했던 김교선’) 수신면과 동면이 마음을 합해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계획된 만남이 아닌 조우(遭遇)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파급력이 컸다. 두 세력이 만나 합쳐 부르는 만세 소리의 위력은 엄청났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간다. 조인원이 저고리를 벗어버리고 주재소장의 총부리를 잡아 제치고, 유중무(유관순의 숙부)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제치고 헌병에게 항의하다가, 이를 만류하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하겠느냐”고 소리 지른다. 시위대 중 한 명인 스물네 살 김용이도 주재소 보조원 정춘영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라면서 주전자를 던진다. 김교선은 주재소 뒤쪽으로 돌아가 전화선을 끊는다. 천안 헌병본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노력에도 본대 헌병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아우내장터로 들이닥쳤다. 맨주먹의 장꾼들은 흩어졌고,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쓰러진 피투성이 시체 30여 구가 장바닥에 늘어졌다. 주도자들은 대부분 붙잡혔다.
수신면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의 마음을 김교선은 이렇게 회고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국의 한과 항일의 염(念)이 있을 것이니….”(신동아 1965년 3월호) 아우내장터에서 울려 퍼진 만세 소리에 담겼던 염원이기도 하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천안시는 2월 28일에 아우내봉화제를 개최하고, 3월 1일에는 유관순 열사 따라 걷기 행사와 뮤지컬 공연 등 천안 독립만세운동 페스티벌을 진행할 예정이다. 만세운동이 열렸던 날인 4월 1일에는 아우내시위 희생자 추모제를 준비 중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 천안 만세운동 국제 학술세미나, 천안 독립운동 영화제 같은 다양한 행사도 예정돼 있다.
천안=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