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장
얼마 전 청와대 인근의 한 음식점. 일행 중 한 명이 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서명이 담긴 액자가 안 보여서다. 이 식당 벽엔 유명 인사들의 서명 액자가 많다. 유엔에 가기 전부터 오랜 단골인 반 전 총장의 액자는 한동안 가장 잘 보이는 벽에 있었다. 직원에게 물으니 “(대선 주자로 거론되던) 2017년 초까지는 걸려 있다가 대선 후 ‘덜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2.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구속된 다음 날인 지난달 31일. 냉면 생각이 나서 서울 무교동의 한 노포(老鋪)를 찾았다. 반 전 총장 단골집 이상으로 유명 인사들의 서명 액자가 많은 곳이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더니 문재인 대통령의 서명 액자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서울 시내, 특히 청와대와 가까운 오래된 음식점에 가면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종종 짐작할 수 있다. 반 전 총장이야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하차했으니 그렇다 치고, 무교동 냉면집은 왜 윤 지검장의 서명을 이렇게 배치했을까. 집권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문재인 정부 하면 아직까지 적폐청산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가 아닐까 싶다. 다른 수많은 유명 인사들보다 ‘적폐청산의 아이콘’인 윤 지검장이 적어도 냉면집에선 자주 회자된다는 방증. 소득주도성장,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파급력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시작해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2019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이어지는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한 수 위라는 얘기다. 김 지사의 구속도 여당은 ‘양승태 적폐세력의 보복 재판’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넓게 보면 적폐청산 이슈에 들어있다. 하긴 대통령수석비서관 중 정무, 국민소통, 경제 등 다른 핵심 수석들은 다들 교체됐지만 새해 들어서도 조국 민정수석은 굳건하다. 적폐청산, 사법개혁 이슈를 계속 수행하라는 것이다.
김 지사 구속 후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적폐청산 이슈의 후폭풍에 휩싸이고 있다. 급기야 여당은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야당은 대선 무효를 언급하며 막가파식으로 충돌하고 있다. 정치 원로들은 ‘사법 폭풍’에 정치가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재감도 못 지키고 있다며 절망하고 있다. 한 여권 중진은 “지금 우리는 전례 없이 검사와 판사가 온 나라를 휘젓는 사법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야권 중진은 “여야가 툭하면 모든 이슈를 검찰 수사에 맡기며 자해행위를 하고 있다. 이러면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도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취임 후 “이젠 국회의 계절”이라며 그 나름대로 정치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문희상 국회의장도 요새 좌절감을 토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주변에 “곧 봄이 올 텐데, 국회에도 꽃이 필까?”라며 씁쓸해했다고 한다. 유감스럽지만 기자 생각엔, 지금처럼 청와대와 서초동에 휘둘리면 한동안 정치의 꽃은 못 필 것 같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