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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면 될까… ‘등골 브레이커’ 세뱃돈

입력 | 2019-02-02 03:00:00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19]]<3> ‘등골 브레이커’ 세뱃돈
신사임당 나온뒤 세종대왕 머쓱… ‘세월에 감사’ 본뜻 살려야
돈 말고 뜻깊은 건 없을까




《“월수입은 자식들이 모아서 주는 200만 원 정도인데…. 공과금에 건강보험료, 생활비 같은 거 하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죠 뭐. 그런데 손녀가 셋에, 조카 손주가 일곱이니…. 올해도 ‘적자 명절’이네요. 허허.”

명절을 한 주 앞둔 지난달 30일, 김종수(가명·70) 씨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5년 전 운영하던 식당을 접고 경기 외곽의 20평대 전세 아파트에서 아내와 단둘이 살아가는 ‘은퇴 노인’이다. 자식들이 주는 용돈 외에 딱히 수입이 없는 그에게 설 명절은 기대만큼이나 ‘부담’도 크다. 세뱃돈 때문이다.

“형제들이 차로 1시간 내 거리에 살거든요. 설 오후에 큰형님 댁에 다 모여요. 이때 ‘출혈’이 큽니다. 꼭 줘야 할 손주들이 10명이고 가끔 지방 사는 조카 손주까지 올라오면 더 많이 줘야 할 때도 있고요.”

5만 원권이 생기면서 부담은 더욱 커졌다. 1만 원권을 주면 세뱃돈을 조금 적게 준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김 씨는 “2년 전부터 무조건 인당 5만 원을 준다”며 “명절이면 최소 50만 원이 드는데, 나이가 들고 은퇴기가 길어질수록 능력에 부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세배 후 응당 세뱃돈이 뒤따르는 설 명절 문화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어려운 경기, 고령시대 속 경제적 부담 없이도 멋지게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가족 모두 행복한 설날을 위해 신예기가 그 답을 찾아봤다.》

김경환(가명·69) 씨는 명절마다 외동딸 내외가 외손주를 데리고 시가에 내려가는 바람에 아내와 단둘이 고향을 찾는다. 그도 지난 설에 세뱃돈 트라우마가 생겼다. 조카 손녀에게 ‘엎드려 절 받기’를 받고 세뱃돈을 줬다가 면박을 당한 기억 때문이다.

김 씨는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손녀가 방에서 게임을 하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나와 세배를 했다”며 “세뱃돈으로 3만 원을 줬더니 ‘이거 주려고 나오랬냐’며 제 엄마에게 인상을 쓰더라”고 말했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배가 ‘돈 받는 행사’로 느껴졌다.

○ ‘감사’와 ‘근신 당부’ 본뜻 잃은 세배 문화

고령층뿐만이 아니다. 5년차 직장인 이은애(가명·33·여) 씨 역시 설 세뱃돈 문화가 난감하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사촌동생들에게 세뱃돈을 줘야 하는 입장이면서도, 아직 미혼이다 보니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는 어색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는 “큰집이라 아침이면 일가친척들이 집에 몰려드는데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며 “올해는 ‘세배 타임’을 피해 설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저녁 때 돌아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본래 세배는 ‘지난 세월에 감사한다’는 뜻을 가진 설 명절 고유의 풍속이다. 새해 첫날 웃어른께 인사를 다니며 그간 보살펴 주심을 감사드리고 강녕(康寧)하시길 기원하며 큰절을 올렸다.

하지만 세뱃돈을 받는 문화가 생긴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은 일이다. ‘세배에 대한 답례로 돈을 줬다’는 기록은 서예가 최영년의 시집 ‘해동죽지(海東竹枝·1925년)’에서 처음 나온다.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는 “일본에는 17세기부터 세뱃돈 문화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그 문화가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당시 세뱃돈은 지금처럼 ‘액수’만 따지진 않았다. 정 학예사는 “세뱃돈은 꼭 봉투에 넣어 겉면에 책값, 붓값 등의 용도를 적어줬다”며 “풍요보다는 근신을 당부하는 덕담이나 글을 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역시 “1960년대만 해도 세배도, 세뱃돈을 주는 방식도 지금처럼 세속적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목욕을 하고, 따로 준비한 새 옷(설빔)을 입은 뒤 절을 했지요. 절을 할 때는 두 손을 모으고 발가락까지 모두 펴서 한 뒤 다시 일어나 반배를 하고 무릎을 꿇는 ‘형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공경도 예의도 없이, 대충 절하고 빨리 돈 받는 게 세배가 돼 버렸죠.”

요즘 초등학생들은 세배를 ‘수금(收金) 행사’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초등학생 아들을 둔 회사원 장동혁(가명·45) 씨는 “설 지나고 아이들이 단톡방에서 각자 받은 ‘세뱃돈 인증샷’을 찍어 자랑하더라”며 “아들이 ‘내가 꼴찌’라며 볼멘소리를 해 난감했다”고 말했다.

○ 액수보다 의미 찾는 세배 문화 되찾아야

명절마다 손주와 그림 그리기 추억을 만드는 정필훈 서울대 교수가 지난달 1일 신정을 맞아 손녀 정라니 양과 함께 돼지를 그리고 있다. 정 교수는 “세뱃돈보다 손녀들과 어떤 그림을, 어떤 의미를 담아 그리면 좋을지가 더 고민된다”며 웃었다. 정필훈 교수 제공

어려운 경기, 고령 시대 속 경제적 부담은 커지면서 진정한 의미는 놓치고 있는 세뱃돈의 대안은 없을까. 정라니 양(4)의 할아버지인 정필훈 서울대 치대 교수(64)는 명절마다 손주들과 그림을 그린다.

“올해는 돼지해란다. 라니도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지 말고 아기돼지처럼 건강해야 해.”

지난달 1일 신정에 정 교수가 손녀와 함께 엄마돼지와 아기돼지 그림을 그리면서 한 말이다. 정 교수는 “손주들이 받은 세뱃돈은 기억 못 해도 할아버지와 함께 그린 그림의 추억은 오래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 방에는 명절마다 손주들과 그린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김광식 씨(55)는 조카들에게 세뱃돈 대신 ‘세배책’을 선물한다. 그는 “선물의 가치는 선물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에 있다”면서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살까’란 교환가치를 생각하지만 책을 받으면 ‘이 책을 왜 줬지, 무슨 의미지’ 하고 사용가치를 곱씹게 된다”고 말했다.

액수보다 ‘재미’를 키워 손주, 조카들과 대화의 길을 여는 할아버지도 있다. 세뱃돈 줄 손아랫사람이 10명이 넘는다는 박주훈(가명·56) 씨는 3년 전부터 세뱃돈 대신 덕담을 적은 로또를 1장씩 나눠준다. 박 씨는 “장당 5000원에 불과하지만 현금으로 세뱃돈 줄 때보다 호응은 더 좋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당첨되면 뭐 할래’라고 물으며 요즘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은 1만 원, 중학생은 3만 원, 고등학생은 5만 원’처럼 일방적으로 세뱃돈 정액을 정해놓지 말고, 세뱃돈이 필요한 이유를 듣고 그에 맞게 돈을 주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김선경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객원교수는 “요즘 아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토론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미션’을 주면 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다”며 “아이가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듣고 어른의 지혜를 더해 주면 더욱 좋다”고 말했다.

신동진 shine@donga.com·김수연·김하경 기자

○ 당신이 제안하는 이 시대의 ‘신예기’는 무엇인가요. newmann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