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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 잃은 윤형숙 열사, 취조하는 일경에 “나는 조선의 血女다”

입력 | 2019-02-02 03:00:00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3화>광주 수피아여학교




수피아여고 대강당 앞에 세워진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광주에서 야소교(예수교)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부상당하여 경찰이 해산시켰음.’
1919년 3월 11일 조선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본국에 ‘전라남도 방면의 정황’이란 제목의 급전(急電)을 보낸다. 하루 전 광주에서 일어난 3·10만세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육군성에 보고한 것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광주의 만세운동을 군중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해산시키면서 이례적으로 부상자 1명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날의 시위가 한 명의 부상자로 인해 더욱 격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 경찰이 서둘러 진압에 나섰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명된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여학생으로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서 일본 경찰과 맞서다가 왼팔을 잃은 윤형숙 열사(1900∼1950)가 그 주인공이다. 최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67)은 “육신의 일부가 절단돼 선혈이 쏟아지는 중에도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친 그를 남도에서는 ‘광주의 유관순’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 상복에 새긴 태극기

홍인화 수피아여고 역사연구소장이 3·10 광주만세운동을 앞두고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었던 수피아홀을 소개하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윤형숙은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치운은 한학자였다. 윤형숙이 7세 되던 해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윤치운은 어린 딸을 전남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했다. 윤형숙은 순천 성서학원을 수료한 뒤 18세에 광주지역 최초 여성 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 진학한다.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는 반장을 도맡았고 ‘반일회(班日會)’라는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당시 수피아여학교에는 애국심이 강한 박애순 선생(1896∼1969·건국훈장 애족장)이 있었다. 박 선생은 당차면서도 과묵한 윤형숙을 각별히 아꼈다. 박 선생은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 사정 등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광주만세운동은 3·1운동 전부터 움트고 있었다. 일본 도쿄 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2·8독립선언을 청년들에게 알렸다. 2월 말 3·1운동 거사준비위원회의 특명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김필수 목사가 최흥종과 김철(본명 김복현)을 만나 거사 계획을 논의한다. 이후 최흥종 김철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 3·1운동 광주지역 총책임을 맡기로 한다. 하지만 최흥종이 인력거 안에서 만세를 부르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자 김철은 홀로 3월 6일 광주로 내려온다.

1919년 작성된 광주지방법원(1심) 판결문에 따르면 김철은 최정두, 김강,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과 3월 6일 양림동 금동교회 남궁혁 장로 집에 모여 거사일을 3월 8일로 잡고 역할을 분담했다. 하지만 준비 시간 부족으로 거사일은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늦춰진다. 그사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참가 독려 작업이 진행됐다. 박애순 선생도 독립선언문 50여 통을 받고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뜻을 모은 학생들은 기숙사인 수피아홀 지하에서 밤새 고종 황제 장례식 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 ‘나는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

전남 여수시 웅처동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벽 한쪽에는 윤형숙 열사(왼쪽 사진)가 태극기를 흔들다 왼팔이 잘려나간 모습이 새겨져 있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거사 장소인 작은 장터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은 장터는 지금의 부동교 밑에 펼쳐진 반달 모양의 백사장 하천변이다. 기독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천, 일반 시민은 서문통(지금의 광주우체국 앞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 농업학교 학생과 군중은 북문통(지금의 충장로2가에서 충장파출소까지)을 거쳐 이곳으로 모였고, 그 인원은 1000여 명에 달했다.

누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동시에 격문과 태극기가 머리 위로 뿌려졌다. 몇몇은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막대기에 태극기를 매달고 휘저었다. 쌀장수는 됫박을 든 채 시위대에 따라붙었고, 걸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타령 대신 만세를 불렀다.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현 광주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충장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댕기머리에 검정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윤형숙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옛 광주지방법원(지금의 동구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향하자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기마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형숙의 왼팔 상단부를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잘려 나간 팔은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급격한 출혈로 윤형숙은 정신을 잠시 잃기도 했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손은 여전히 태극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온몸이 핏물에 젖은 윤형숙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으로 잘려 나간 왼팔이 움켜쥐고 있던 태극기를 뽑아든 뒤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항거에 나섰다. 군중이 광주경찰서로 몰려들자 일제는 무력 진압의 수위를 높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물들었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현장 구금되었다.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형숙의 행동에 일본 군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육군성에 보낸 전보에서 부상자를 언급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응급치료를 받은 그는 일경의 취조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너를 조종한 배후는 누구냐?”며 압박하는 일경에 윤형숙은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라며 꼿꼿하게 버텼다.

○ 역사의 별이 되다

광주만세운동은 다음 날인 11일에도 계속됐다. 오후 5시 무렵 숭일학교 학생과 농업학교 학생 3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23명이 구속됐다. 13일 큰 장날에는 장꾼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이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0명이 체포됐다. 당시 광주의 인구가 1만여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대단한 시위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연이은 시위로 시내 경비가 삼엄해졌다. 그러나 상인들은 철시(撤市)로 맞섰고, 비아, 하남, 임곡, 동곡, 평동, 삼도, 본량 등 각 면에서는 4월까지 산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윤형숙이 다녔던 수피아여학교는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로 강제 폐교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수피아여고 대강당 앞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기념 동상 뒷면에는 당시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중 일제에 의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옆면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홍인화 수피아여고 역사연구소장(55)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선배들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 매년 3·1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쪽 팔을 잃은 윤형숙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신문을 계속 당했다. 일경은 굽히지 않는 그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까지 멀게 했다. 징역 4개월을 선고하고, 감옥에서 그가 나온 후에도 4년간 격리 수용하며 괴롭히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윤형숙은 이 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헌신적인 삶을 이어갔다.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뒤 전북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학교와 전북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역사는 윤형숙 열사에게 가혹했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에게 더 큰 비극이 닥쳤다. 윤형숙은 평소 반공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다. 지인의 집으로 피신해 있던 그를 체포한 북한군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퇴각하기 전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그를 총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0이었다.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숭고한 삶은 사후 54년이 지난 뒤에야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가 묻힌 고향마을 묘비석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첫 지역지 조선독립광주신문

“조선독립 제창하니 바다가 끓고 산이 동했네”
3·10만세운동 세간에 알린 광주의 ‘지하신문’
제중병원 회계원 황상호가 제작… 시민 상대로 1호부터 3호까지 발행

광주 최초 신문인 조선독립광주신문. 1호 신문은 1919년 3월 11일 300부가 인쇄돼 13일에 시민들에게 배포됐다.

‘광주에 참빛이라. 광주라는 빛 광자가 이제야 참말 빛이 되었구나. 지나간 삼 월 십 일 오후 세시 반에 조선독립 단체 학생과 청년들이 … 십 년 동안 감초였던 태극기를 높이 들고 …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니 바다가 끓고 산이 동했네.’

1919년 광주 3·10만세운동을 다룬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 제1호 2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이 신문은 광주에서 최초로 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인쇄물이다. 양림동에 있던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 회계원인 황상호가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발행한 일종의 ‘지하신문’이다. 그는 ‘황송우(黃松友)’라는 가명으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병원 등사판으로 밀어 비밀리에 살포했다. 당시 서울에서 윤익선의 명의로 발행되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받아 보고 생각해 낸 것으로, 제중병원 약제사인 장호조와 간호인인 홍덕주의 협조를 얻어 3호까지 발행했다. 제1호는 1919년 3월 11일에 300부를 인쇄해 13일에 광주 큰 장터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크기는 9절지(시험지) 두 장에 한 면씩 등사한 것으로, 첫 면에는 서울에서 온 ‘조선독립신문’ 기사 내용을 간추려 쓰고 두 번째 면에는 10일 광주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기록했다.

신문 발행을 주도한 이들은 모두 일제에 체포돼 황상호는 3년, 홍덕주와 장호조는 각각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 신문의 원본은 1983년 전남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을 보수하던 중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과 함께 발견됐다.

광주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61)는 “이 신문은 1919년 4월 8일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을 이룬 4·8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며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강건하게 일어난 광주의 정신을 보여준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이 신문의 원본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고 사본은 광주기독병원 1층 역사·의학자료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