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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파-중앙파-현장파, 뿌리 깊은 갈등… 강경투쟁 악순환

입력 | 2019-02-02 03:00:00

[위클리 리포트]민노총 “경사노위 불참-2월 총파업” 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지난달 28일 서울 강서구 KBS 아레나홀에서 제67차 정기 대의원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민노총은 이날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참여여부를 논의했지만 수정안으로 제출된 3개 안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20년 만의 사회적 대화 복귀가 무산됐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제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사회적 대화에 복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의 대의원대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서울 강서구 KBS 아레나홀. 10시간 9분간의 격론 끝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참여가 무산되는 상황을 지켜본 한 대의원은 “사회적 대화에 강한 의지를 보인 김명환 위원장도 강경파들의 조직력 앞에서는 무기력했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민노총은 경사노위 불참 결정에 이어 1일 ‘2월 총파업’을 선언하며 또다시 ‘강경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전문가들은 민노총의 뿌리 깊은 정파 갈등과 강경파의 헤게모니 장악이 ‘투쟁의 악순환’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1995년 출범한 민노총이 처음부터 사회적 대화를 거부했던 건 아니다. 민노총은 김대중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98년 1월 설립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다. 이듬해 2월 정리해고 법제화 등이 담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이 협약은 국내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이뤄낸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국가적 위기 극복에 민노총도 동참해야 한다는 당시 지도부, 특히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직후 열린 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협약은 부결되고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뒤이어 당선된 이갑용 전 위원장은 1999년 2월 노사정위를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민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거부한 채 강경투쟁 일변도로 나가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신의 이수호 위원장이 노사정위 복귀를 강하게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이 민노총이 노사정위에 복귀할 수 있도록 상당한 공을 들인 만큼 대의원들이 표결할 경우 노사정위 복귀가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자 강경파들은 2005년 11월 열린 대의원대회의 단상을 점거하고 소화기를 뿌리는 등 폭력으로 대회 자체를 무산시켰다. 이후 강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은 민노총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아예 대화 자체를 거론하지 않고 거리투쟁만 고집했다.

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뿌리 깊은 ‘정파 갈등’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노총은 크게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의 3개 정파가 있다. 국민파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현장파’는 사회적 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전투적 노동운동을 고집한다. 사회적 대화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정부와 재벌의 들러리로 서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든 것이 바로 현장파다.

이런 정파 갈등은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두고 1980년대 진보 진영에서 벌였던 ‘사회구성체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파는 민족민주(NL) 계열, 중앙파와 현장파는 민중민주(PD) 계열로 분류된다. 결국 국민파는 사회적 대화의 책무가 있다고 인식하는 반면 현장파는 강경투쟁을 통해 ‘노동해방’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둔다. 민노총의 정파는 결국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정치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셈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NL과 PD의 통합은 민주당과 한국당의 합당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 진영은 서로를 극단적으로 배척한다. 3년마다 열리는 민노총 지도부 선거는 양 진영의 갈등으로 극심한 홍역을 치른다. 민노총이 정파 갈등에 매몰되는 사이 국민들은 민노총을 ‘내셔널센터’(산별노조의 전국 중앙조직)가 아닌 ‘정치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

민노총의 조합원 전체로 놓고 보면 국민파와 중앙파는 각각 40%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대 세력’이다. 현장파는 영향력이 10∼20%로 소수파다. 이번 대의원대회에 현장파들이 낸 ‘경사노위 무조건 불참안’은 가장 낮은 찬성표(331표)로 부결됐다.

문제는 소수파에 불과한 현장파와 중앙파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선명성 경쟁’을 통해 대의원들을 장악하고 민노총 전체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이른바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현상이 민노총에 만연해 있다는 얘기다. 실제 강경파들은 ‘보이콧’ 전략으로 지난해 10월 대의원대회를 무산시켰고 지난달 대의원대회에서는 모든 안건을 부결시키는 전략으로 지도부의 경사노위 참여 의지를 무력화시켰다.

임무송 한국산업기술대 석좌교수는 “민노총은 비효율적 의사결정 구조로 ‘결정장애’에 빠졌고 정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와 경영계에 책임을 돌리는 게 정파 갈등을 봉합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사업장별 교섭 대표노조 지위 놓고 양대 노총 세불리기 경쟁 ▼

한국노총 조합원수 103만 vs 민노총 99만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은 한국 노동계를 대표하는 두 축이다. 두 노총은 ‘탄력적 시간근로제 확대 반대’와 같은 중요 사안엔 한목소리를 내며 공조한다. 하지만 경쟁 관계일 때가 더 잦다. 민노총이 한국노총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결성된 태생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은 1946년 결성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전신으로 두고 있다. 대한노총은 우익 정치인과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결사체에서 시작됐다. 1961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한국노총으로 개칭됐으나 정부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화 이전 한국노총은 ‘어용 노조’란 비판을 받았다.

민노총의 전신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다. 어용 노조운동과 결별하고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겠다는 취지로 결성했다. 1995년 법외노조로 시작한 민노총은 1997년 노동관계법의 복수노조 금지조항이 폐지되면서 합법 단체가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두 단체는 투쟁 노선에서도 차이가 있다. 한국노총은 비교적 온건하며 교섭을 중요시하지만 민노총은 여전히 총력 투쟁에 골몰하는 등 강경한 노선을 걷고 있다.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도 한국노총은 협조적인 편이지만 민노총은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뒤 아직도 복귀하지 않고 있다.

최근엔 민노총이 한국노총 규모를 따라잡으면서 외형적 경쟁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노총 조합원 수는 103만6236명, 민노총은 99만5861명이다. 현장에서는 전체 조합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노조가 사용자와의 교섭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지난해에 포스코의 한국노총 노조가 과반수 노조 지위를 확보하자 민노총이 “회사가 한국노총 가입을 종용한 것”이라며 ‘어용 노조’ 프레임을 씌우며 갈등을 빚었다.

최근 한국노총 소속 SK하이닉스 노조가 1700% 성과급을 받기로 한 임금·단체협상 합의안을 부결시킨 것도 “더 많은 조합원의 이득을 얻기 위해 쉽게 회사안을 받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줘 민노총 소속의 새 노조와 교섭 대표 지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박은서 기자 clu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