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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을 황금돼지해로 규정하는 생각 속에는 우주의 우발적 흐름에 규칙을 부여해 삶에 안정적 리듬을 확보하려던 오행론적 개념이 담겨 있다. 과학적 견지에서는 미신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운명의 주기를 믿고 싶어 하며, 설령 내심 믿지는 않더라도 즐거운 상상의 유희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런 유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성숙한 비전을 가져올 수 있다면 역사 속 기해년을 반추하려는 우리 시도도 그저 헛되지만은 않으리라.
백제 무왕의 왕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와 사리호. 상자 안은 사리봉안기 확대 사진이다. [사진 제공 · 국립부여박물관]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동맹 라인을 공고히 한 무왕의 본뜻은 중원에서 일어난 강력한 정복 왕조인 당을 견제하면서 인접국 신라를 쪼그라뜨려 침체돼 있던 자국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이런 실리 위주의 전략은 백제 귀족을 왕 주위에 결속시키는 효과를 낳은 반면, 신라와 전략적 공생관계의 균형이 깨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로 인해 절박한 생존 위기에 처한 신라가 당과 연합해 마침내 백제를 무너뜨리게 된다.
무왕이 한 선택은 오로지 그 혼자만의 결단은 아니었으리라. 가장 약해 보이는 이웃을 적으로 돌리고 강성한 제삼자를 우군으로 삼는 방책은 당장 약효를 발하는 대증용 약재와도 같아 누구나 선뜻 구미가 당긴다. 그렇다 보니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물리적, 심리적 전리품들을 나눠 가진 왕과 친위 귀족은 안으로 더욱 똘똘 뭉쳤을 것이다. 하지만 한 세력이 나머지를 모조리 흡수하지 못하는 한 힘의 균형추는 늘 가운데 눈금으로 향하게 돼 있다. 고구려나 왜에 반대하는 내부 세력, 신라와 동맹을 유지하려는 내부 세력,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 전체가 필사적으로 무왕 세력에 대항하고자 단결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신라에 적대 정책을 편 무왕과 익산을 중심으로 한 토호귀족 사택 씨의 견고한 제휴를 상징하는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는 역사 흐름의 조짐에 눈감은 불행한 선택의 흔적일 수 있다. 아니, 백제 멸망의 조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처럼 훗날 심대한 변화를 몰고 올 조짐들은 지나고 나서야 눈에 띄거나 당시에는 사소하게 취급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폭정의 잉태, 예송논쟁의 점화, 태풍 사라
KBS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 정중부 역을 맡았던 배우 김흥기. [사진 제공 · KBS]
조선과 달리 고려는 유교 의례가 엄격히 정착된 사회가 아니었다. 상하가 격식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다. 임금과 신하가 어울려 시를 짓고 폭음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김돈중의 실수는 슬쩍 넘겨도 좋을 일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자존심 강하고 하필 술기운마저 없던 정중부는 이를 용서치 않았고, 이는 평소 문무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신들의 화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고려 멸망을 몰고 온 도화선이 된 홍건적의 침입이 1359년 기해년에 벌어졌으며, 왕가의 사사로운 폭력 사태처럼 보였지만 훗날 연산군 폭정의 빌미가 된 왕비 윤씨의 성종 용안 훼손과 이로 인한 폐비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1479년 기해년이었다.
SBS 사극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 역의 구혜선이 사약을 마시고 있다. [사진 제공 · SBS]
1839년에는 3명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해 천주교인 119명이 처형되거나 투옥된 기해박해가 발생한다. 표면적으론 2차 천주교 박해였지만 이면적으론 헌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득세한 풍양조씨 문중과 정조 사후 세도정치의 핵이던 안동김씨 문중 간 권력 투쟁의 부산물이었다.
1899년 창간 4년 만에 폐간된 ‘독립신문’(왼쪽)과 1959년 9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가 남긴 흔적. [동아DB]
이처럼 지난날의 수많은 조짐을 돌이켜보면 볼수록 우리는 문득 숙연해지고, 환히 웃는 기해년 첫 태양을 바라보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된다.
윤채근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zoongsoo@hanmail.net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74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