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에서 이겨 값진 설 선물을 받은 기분이지만 달라지는 게 있을 지 모르겠소.”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노역 피해자 오경애(88) 할머니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인 6일 광주 서구 자택에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에 분노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달 30일 서울고법은 오 할머니 등 5명이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유지, 후지코시가 원고에 각각 위자료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남 광산군(지금의 광주시 광산구)에서 살던 오 할머니는 1944년 3월 극락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사정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오 할머니의 아버지는 ‘순사들이 동네를 돌며 13~15세 또래 소녀들을 강제로 데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오 할머니를 식료품을 저장하는 토굴에 숨어 지내게 했다.
토굴에서 지내며 집안일을 돕던 오 할머니는 그해 겨울께 자신의 일본어 이름인 ‘후지와라 게이아이’를 부르는 모교 담임교사를 우연히 만났다.
오 할머니는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담임교사가 ‘일본에 가면 돈을 벌며 중학교 학업도 계속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부모가 역까지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했고, 부모가 가져온 의류와 찐쌀이 담긴 보따리만 건네받았다.
이후 부산을 거쳐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현에 위치한 기계부품 생산업체 후지코시에 도착한 오 할머니는 기숙사에서 군대식 생활을 하며 하루 9시간가량 기계부품을 닦고 검수하는 일을 했다.
오 할머니는 “일이 서툴면 일본인 직원들에게 매를 맞았다”며 “식사도 부실하고 일이 힘들어 당시 근로정신대 사이에서는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며 서로 애환을 나눴다”고 말했다.
1945년 7월부터는 군수공업지대 일대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오 할머니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뛰어가는 것이 일상이었다”면서 “야간 공습이 시작되면 근로정신대로 온 소녀들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토로했다.
오 할머니는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한동안 혼삿길이 막혔다. 내게 무슨 죄가 있는지 억울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오 할머니는 전처와 사별한 남편과 혼인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오 할머니는 70여년 간 자녀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근로정신대에 다녀온 사실을 숨겼다.
오 할머니는 “주변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이 두려웠다”면서 “평생 맺혔던 한을 풀기 위해 뒤늦게 용기를 내 소송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무릎 통증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오 할머니는 지난달 30일 열린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고심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하루 빨리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이 참회하고 배상하길 바라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광주=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