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김황 일기로 본 유림의 3·1운동
경남 산청의 청년 유림 김황이 작성한 ‘기미일기’의 필사본. 김황이 1919년 2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3개월 17일간 3·1운동을 전후해 경성에 다녀온 기록과 파리장서운동을 위해 노력한 과정이 순한문체로 적혀 있다. 최근 이 일기를 분석한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는 “회고록 같은 짧은 글이 아니라 일기의 형태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고,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서동일 학예연구사 제공
경남 거창에서 은거하던 영남유림의 대표 격인 곽종석(1846∼1919)은 결단을 내린다. “태황제(太皇帝)께서 40년간 임어(臨御)하셨고, 나라를 잃은 것이 또한 그 몸에 있지 않으니 어찌 상복을 입지 않겠는가”라며 조선의 실질적 마지막 임금 ‘고종’에게 예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곽종석은 제자인 중재(重齋) 김황(1896∼1978·사진)에게 경성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한다.
김황은 스승의 명에 따라 2월 27일 경성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한다. 그는 열흘간 경성에 머물며 3·1운동 전후 만난 인사들과 각종 사건을 빠짐없이 ‘기미일기(己未日記)’에 남겨뒀다. 이 기록에는 근대적 의미의 ‘독립’에 수긍하지 못했던 청년 유학자가 결국 유교계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기까지 드라마 같은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이 일기를 분석한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의 논문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를 통해 청년 유림의 눈에 투영된 3·1운동을 들여다봤다.
김황 일행은 경성에 있던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3·1운동 계획을 전달받는다. 3월 1일 당일 오전에 지인으로부터 “3월 1일 오후 3시,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는 뜻으로 손병희 등 여러 분들이 문서를 작성하고 선언을 한다”며 소요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 바깥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부에 따라 여관에 머물던 이들은 저녁이 되자 경성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 듣는다.
고종의 인산일이던 1919년 3월 3일 종로를 지나고 있는 죽안마(竹鞍馬). 김황은 기미일기에서 “고종의 상여 행렬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다음 날인 2일 김황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향했다. 준비해 둔 작은 종이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함에 넣은 뒤 엎드려 곡을 하고, 네 번 절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엎드려 통곡하는 이들로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었다.
이날 밤 김황이 머물던 여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사촌동생 민용호였다.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김황에게 들려준다. 고종이 자연사한 게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 서 학예연구사는 “고종 독살설이 지하신문이나 격문 같은 선전물 형태가 아닌 궁중 인사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은 처음 밝혀진 사실”이라며 “진위와 관계없이 고종 독살설은 충군애국(忠君愛國) 의식이 강한 유림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슬픔과 혼란에 빠져있던 김황에게 당시 경성에서 유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김창숙(1879∼1962)이 찾아왔다. 3·1운동 민족대표에 유교계만 빠져있었다며 파리 국제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10일 경남 거창으로 귀성한 김황은 스승에게 경성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내용을 전달한다.
곽종석은 마침내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김황에게 작성하라고 지시한다. 3월 말이 되자 김황의 초안을 바탕으로 유교계의 독립청원서 파리장서(巴里長書)가 완성됐다. 이 문서에 서명한 유림만 137명. 수백 년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모두 참여했다.
서 학예사는 “김황의 일기에선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 흐름을 마주한 청년 유림 내면의 미묘한 흔들림이 녹아있다”며 “상대적으로 외면받았던 유교계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