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올가 토카르축 지음·최성은 옮김/380쪽·1만4000원·은행나무
짤막한 분량의 조각글 84편이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전진한다. 각 조각글에는 ‘○○의 시간’이란 머리글이 달렸다.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새파란 청년에게 설렘을 느끼는 게노베파의 시간, 딸과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질투하는 미하우의 시간, 경험한 모든 선과 악을 체화하는 크워스카의 시간….
이웃 격인 이들의 시간은 얽히고설켜 거미줄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는 게노베파의 아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게노베파의 딸과 보시키 영감의 아들은 사랑에 빠진다. 크워스카는 느닷없이 광기에 사로잡힌 플로렌틴카의 딸이 되길 청한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진창 같은 현실에서 기댈 곳은 서로의 어깨뿐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방랑자들’로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올가 토카르축의 첫 국내 출간 장편소설이다. 유대인 학살과 1·2차 세계대전, 냉전체제 등 폴란드를 훑고 간 역사적 비극을 곳곳에 배치했다. 환상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중간 지점에서 실재보다 더 생생하게 현실을 구현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온 세상이 새로워 보이는 착각마저 든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