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베이비붐 세대’ 당구열풍의 사회학
이들이 뒤늦게 빠져든 당구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비용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게 주머니가 얇아진 5060세대에게 어필하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사회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여기에 의학적으로 건강 효과가 상당하다는 연구 결과도 영향을 미쳤다. 5060세대의 당구 열풍을 해부해 봤다.》
최근 5060세대 사이에 당구가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중장년층이 당구장으로 몰리고 있다. 7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당구장에서 중장년층들이 당구를 즐기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또 오셨어요?” 당구장 주인이 밝은 목소리로 맞았다. 이들은 대기업에서 은퇴한 후 퇴직자 모임에서 만난 당구 동호인들. 어느덧 친해져 당구장을 함께 찾는 사이가 됐다.
박세득 씨(73)는 스스로를 ‘돌아온 초보’라고 했다. 한 달 전, 50년 만에 큐대를 잡았다. 박 씨는 “은퇴 후 골프도 치고 다른 취미생활을 해봤지만 당구만 한 게 없다. 몸에 무리도 안 가고 또래와 쉽게 어울릴 수 있다”며 웃었다. 박 씨는 며칠 전 스코어 150을 돌파했다. 몸이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함께 온 곽철호 씨(67)는 2년 전 시작한 당구에 푹 빠져 당구 예찬론자가 됐다. “골프, 등산은 갈수록 힘이 부쳐요. 저렴하게 즐기고 두뇌 회전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삼조 아니겠어요.”
○ 당구장마다 ‘5060’ 북적북적
1일 오후 동아일보 취재팀이 서울 여러 지역의 당구장을 동시에 찾았다.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 30대 젊은층도 간혹 있지만 주류는 50대 이후였다.
성동구 마장로 3층짜리 건물의 2층에 있는 삼성당구장. 중절모에 한껏 멋을 부린 60대 노인 4명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 당구장은 성동구에서 노인들 사이에 명소로 꼽힌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이 당구장 김원근 사장은 “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실버할인’을 시행해 입장료 5000원만 받는다. 여성은 할인 폭이 더 커 3000원만 내면 된다. 이 때문에 낮에 중장년층이 많이 몰린다”고 소개했다. 박 씨라고 성만 밝힌 60대 노인은 “푼돈으로 이보다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레저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기적으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당구대회를 여는 당구장도 제법 많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복지관도 잇달아 당구교실을 열고 있다. 성동구 사회복지사 지현호 씨는 “최근에는 60대 여성 신청자가 크게 늘고 있다”며 “모집 정원(144명)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고 말했다.
○ 재미 넘치는 ‘불황’형 소비
이장영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스포츠 여가·문화사회학 전공)는 “은퇴 또는 명예퇴직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당구에 몰리는 것은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지출이 적어야 하고,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을 찾다 보니 그게 당구라는 것. 최근 들어 당구 전용 케이블 채널에 각종 대회까지 열리는 것도 5060세대 당구 열기를 부추겼다. 이 교수는 “(자신도) 매주 토요일 당구 동호회에서 2, 3시간씩 게임을 즐긴다”며 “당분간 당구가 은퇴자들의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레저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사자인 5060세대는 어떤 이유로 당구에 끌릴까. 50대 회사원 이기호 씨는 저렴한 이용료를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2만 원 정도만 내면 2시간을 즐길 수 있어 스크린골프의 절반 값이다. 회사 동료들과 저녁 때 1차로 소주 한잔하고 2차로 당구장에 간다. 진 팀이 게임비와 맥주 한잔 값을 추가로 내지만 이 또한 큰 부담은 아니다.”
결국 당구가 적은 돈으로 최고의 ‘가성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장기간 계속되고 있는 경기 침체와 무관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 아날로그 감성에 만족감 극대화
여기에 중장년층 사이에 불고 있는 복고 열풍도 당구 인기에 한몫했다. 학창 시절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던 추억 등 ‘아날로그’ 감성에 자극을 받아 당구로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원 김현태 씨(50)는 “요즘 당구장에 가면 고교 시절 선생님 몰래 치면서 가슴 졸였던 생각이 난다”며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다는 ‘당구장 짜장면’을 먹을 수 있지만 담배를 못 피우는 것은 좀 아쉽다”고 털어놨다. 사업가 조영채 씨(51)도 “당구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젊은 날 친구들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유희문화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당구장 산업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PC방이 생기면서 20대가 대거 당구장을 떠나는 바람에 당구장은 1999년 2만8300여 곳에서 2003년 1만4900여 곳, 절반 가까이로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최근 5060세대의 당구 열풍에 전국 당구장 수는 지난해 말 기준 2만2000여 개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 J빌리어드 당구장 음 사장도 불황의 틈을 노려 3년 전 이곳을 인수했다. 이곳은 그 일대에서 유명한 단란주점이나 나이트클럽이었다. 이 일대의 노래방이나 찜질방 등이 문을 닫으면서 당구장이 자리를 채운 셈이다. 창업 트렌드 전문가 허건 행복한가게연구소장은 “여가 시간은 늘어났지만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중장년층이나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에게 당구는 제격이다”라며 “불황형 소비이기도 하지만 불황형 창업 아이템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50대 이후에 권할 만한 저강도 운동
당구가 5060세대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요소다. ‘당구 마니아’ 김선수 씨는 “당구는 실내에서 안전하게 즐길 수 있고 관절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 동년배들과 어울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도 즐거워진다”고 예찬론을 펼칠 정도다.
이런 믿음은 실제로 근거가 있다. 2014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노후건강연구소가 60, 70대를 대상으로 당구와 노년 건강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주 4회 이상 당구 게임을 즐기는 사람일수록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중장년층 남성들이 당구를 즐기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높임으로써 삶의 질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내 의학자들도 이런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당구대 한 바퀴를 돌면 10∼13m를 걷게 된다. 1시간 당구를 즐긴다면 적게는 2km에서 많게는 4km까지 걷는 셈이다. 박윤길 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당구는 과격한 신체 접촉이 없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저강도 운동으로, 만성질환이 있을 수 있는 50대 이후 세대에게 권할 만하다”고 말했다.
공을 칠 때 취하는 기마 자세는 하체 근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박 교수는 “다만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기 때문에 허리가 약한 중년에게는 다소 무리가 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선 사전에 충분하게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당구공을 칠 때는 상당히 집중해야 한다. 초보라면 공을 치기 전에 계산할 게 별로 없지만 실력이 늘수록 공략법이 복잡해진다.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두뇌 활동도 활발해진다. 게다가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사회적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이로 인해 뇌와 관련된 질병을 막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박 교수도 “또래들과의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 인지장애와 치매를 막는 데 도움을 준다”며 이 같은 의견에 동의했다.
김상훈 corekim@donga.com·송진흡·유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