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 스트롱맨의 콘크리트 지지층 해부
○ ‘팬덤’ 형성한 콘크리트 지지층
미국 중부 시카고 인근에 거주하는 50대 한국계 이민자 라나 리 씨와 백인 수 새들러 씨는 기자에게 스스럼없이 “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자”라고 밝혔다. 2016년 대선 당시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새들러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공약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을 보고 그의 팬이 됐다”고 털어놨다.
주류 언론과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끊임없는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2년 넘게 특유의 저돌적 국정 운영을 고수하는 힘도 여기서 나온다. 특히 ‘코어 그룹’으로 불리는 지지층은 주로 보수 성향이 강한 미 중부, 주요 대도시 외곽의 블루칼라 백인, 복음주의 성향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들이 2016년 대선 및 2018년 중간선거 때 트럼프 지지율과 실제 투표율을 대폭 끌어올렸다고 분석한다. 앞으로도 이 성향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트럼프 대통령의 2020년 대선 가도에도 별문제가 없다고 전망한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트럼프는 풀뿌리 선거로 이긴 대통령”이라며 “지지자들의 속내와 수요를 정확히 읽고 공략한다”고 평가했다. 실제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의 선거자금 중 60%가 200달러 이하 소액 기부였다. 재선을 위한 후원금은 지난해 말 이미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최대 보수 우파 조직으로 꼽히는 일본회의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일본회의는 중앙본부 간부 400여 명을 포함해 전체 약 4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민간단체를 표방하지만 정당 같은 모습도 띠고 있다. 일본 전역의 47개 광역자치단체(도도부현)에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지역본부가 있을 정도로 조직력도 탄탄하다. 2018년 출범한 4차 아베 내각 장관 19명 중 무려 16명이 일본회의 회원일 정도다.
지난달 19일 도쿄 메구로(目黑)구에 자리한 일본회의 사무총국 집무실을 직접 찾아가니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자’는 포스터 문구가 눈에 띄었다. 10평(약 33m²) 남짓한 집무실은 전국 각지로 보내는 전단과 인쇄물을 담은 택배 상자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단순히 팬덤 지지층만으로 두 사람의 강력한 리더십을 설명할 수는 없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어떤 지지도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실제 일본 젊은이들이 아베 총리에게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도 ‘경제’다. 그는 두 번째 총리 임기가 시작된 2012년 12월부터 노골적으로 시중에 돈을 풀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였다. 엔 약세로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자 기업실적 호조, 주가 상승, 고용 확대가 뒤따랐다. 일본 경제는 2012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무려 74개월(6년 2개월)째 성장세를 보이는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기간 호조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이다. 2018년 봄 졸업한 일본 대학생 취업률은 무려 98%에 이른다. 지난해 일본 유효구인배율(구직자 1명당 일자리 비율)은 1.61배로 1973년(1.76배) 이후 역대 두 번째로 높다. 지난해 실업률도 1992년 후 26년 최저치인 2.4%. ‘엔 약세→수출 경쟁력 증가→대기업 실적 개선→투자 및 고용 확대’의 선순환이 뚜렷하다.
미국도 비슷하다. 최근 일부 경기둔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미국 실업률은 3.7%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3분기 미국 성장률은 3.4%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1분기(1.8%)의 약 2배. 트럼프 대통령의 5일(현지 시간) 국정연설에서 참석자들이 환호한 부분도 경제성과를 자랑할 때였다. 그가 “미국 경제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 어떤 지역보다 미국 경제가 뜨겁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미국(USA)”을 연호했다. 경제를 호조로 이끈 강력한 지도력은 이들을 단순히 기인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팩트인 셈이다.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또 다른 무기다. 저속한 표현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 “대통령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지만 이에 열광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트위터 특유의 짧은 글과 반복적 표현은 복잡다단한 세상에 지친 대중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정치인의 주요 자질이 대중과의 소통 능력임을 감안할 때 반대파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 외모 등을 문제 삼는 인신공격으로 반대파를 공격한다. 민감한 뒷이야기도 당사자 동의 없이 마구 공개한다. 그는 지난달 자신을 비판한 밥 코커 상원 외교위원장에 대해 “중간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아서 망했다”고 강펀치를 날렸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노(老)정객의 마지막 행보에까지 굴욕을 안길 정도로 무자비하다.
아베 총리 역시 직설화법을 꺼리는 일본 문화에서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그는 “아베노믹스를 믿고 투자해 달라”며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성을 붙인 경제 조어(造語)를 스스럼없이 말한다.
또 그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면서 평화헌법 개정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자학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교육 관련법 개정이나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도 거부감이 없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한 외교관은 “포스트 아베에 대한 기대도 접어야 한다”며 “누가 후임자가 되든 그는 아베 총리보다 더 강한 우익 성향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국 외교 당국이 대외 정책에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할 때”라며 “일본, 중국, 북한의 가치를 냉정히 따져 보고 누가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인지를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의 임기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현실에 맞는 접근법을 만드는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지적인 셈이다.
▼ 美-日스트롱맨에 대처하는 한국외교 해법은? ▼
트럼프의 과시욕 활용하고, 日엔 과거사-안보 분리 대응해야
미국과 일본의 두 ‘스트롱맨’은 외교 정책에서도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외친다. 사업가 출신답게 외교 정책의 우선순위도 ‘돈’에 연결하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 및 방위비 문제로 한국과 삐걱거리는 것이 대표적. 남북관계 진전과 북한 비핵화 속도에 대한 한미 인식 차이도 매우 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에 대한 강경 자세로 유명하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초계기 및 레이더 갈등,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 어떤 문제에서도 양보하지 않는다. 레이더 문제는 일본 방위성 내에서 “갈등을 빨리 마무리하자”는 실무진 주장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가 강경 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두 사람의 성향을 감안할 때 한국의 대응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미국을 전통적 우방으로 맹신하고, 일본에 내내 “과거를 직시하라”고만 요구해서는 각종 첨예한 사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대미, 대일 외교를 펼쳐야 할 때다.
미국 전문가들은 대미 정책을 수립할 때 과시욕이 있고, 협상과 담판을 즐기며,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트럼프 대통령의 성격과 202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놔두고, 대통령 집무실(오벌오피스) 방문객들에게 이를 자랑하듯 보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리프 심스 전 백악관 메시지전략담당관은 최근 출간한 저서 ‘독사들의 팀(team of vipers)’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여행가이드 같다. 사람들에게 백악관 곳곳을 직접 소개하는 것을 즐긴다”고 평가했다.
로버트 뮬러 특검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 결과 발표,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이 예고한 각종 청문회와 전방위적인 조사 움직임 속에서 재선(再選)은 그의 지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흥망성쇠가 아니다. 조사의 칼날이 그의 자녀를 비롯해 트럼프 일가가 소유한 각종 사업체 등을 정면으로 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최측근 로저 스톤마저 최근 전격 체포되는 등 러시아 스캔들 수사는 갈수록 그를 옥죄고 있다. 그가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이유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트럼프 대통령은 꼼꼼하게 협상 세부 사안을 챙기기보다 본능과 직관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즉, 치밀하게 준비한 협상 상대방을 만나면 힘을 못 쓸 수 있다”고 트럼프 ‘대응 요령’을 조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부러 위협을 증폭시키거나 요구 조건을 최대치로 높인 다음 상대방에게 자신의 아량을 과시하며 요구치를 낮춰주는 식의 협상을 즐긴다. 이 때문에 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읍소하거나, 초반부터 수세적으로 나가면 주도권을 잃을 것이라고 많은 외교 전문가는 경고한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대표적이다. 한 고위 외교소식통은 “분담금을 늘리는 대신에 ‘자체 국방예산을 줄여야 하는 미국을 도와 중국에 대응하겠다’는 논리로 핵잠수함 개발 및 F-22 랩터 전투기 등을 요구해도 좋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공격적 맞대응 카드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일본 전문가들 또한 한일 갈등을 풀기 위해선 ‘과거 직시’를 반복적으로 요구할 게 아니라 최우방국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한 외무성 간부가 사석에서 “한국이 중국 및 북한과 접근하고, 일본을 등한시하는 ‘전략적 미스’를 저지르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기대치와 신뢰도는 바닥을 찍고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주장대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판가름을 내자”고 주장해 주목받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로 탈출구 없이 한일 간 갈등을 빚기보다 제3의 기관을 통해 논란에 마침표를 찍자는 것. 그는 “어느 측이든 패소한 국가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면 한일 간에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상대국에 대한 신뢰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전직 외교관은 “헌법 개정, 군비 강화 등 일본 내치(內治) 사안에 대해 한국이 지나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며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경제, 안보 등 일본과 협력할 분야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했다.
워싱턴=이정은 lightee@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