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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무의 오 나의 키친]〈52〉커틀릿의 바삭한 변주곡 ‘돈가스’

입력 | 2019-02-11 03:00:00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내가 서울 중심에 사는 이유이기도 한데, 계절을 느끼기 위해 남산을 자주 오른다. 도심을 지나 언덕의 시작에는 돈가스 전문 식당들이 즐비하다. 식당 주인들은 택시 운전사, 데이트 중인 커플, 아이가 딸린 가족들을 서로 모셔가려 주차 안내에 바쁘다.

돼지고기를 저민 뒤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요리인 ‘돈카쓰’는 프랑스어 ‘코틀레트(cotelette)’에서 이름을 따 왔다. 원래는 송아지, 양, 돼지의 갈비와 함께 붙은 고기에 빵가루를 입히고 버터에 바삭하게 지져낸 다음 오븐에 익혀 완성한다. 프랑스의 코르동블뢰는 고기 안에 치즈를 넣어 지져낸 것이며 이탈리아의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세, 오스트리아의 송아지 슈니첼도 비슷한 요리다. 영어 커틀릿의 발음이 힘든 일본인들은 ‘가쓰레쓰(katsuretsu)’로 부르다가 좀 더 쉽게 ‘가쓰’로 짧아졌다. 돼지고기를 사용하면서 ‘돈(豚)’과 함께 돈카쓰가 됐다.

처음 일본에서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커틀릿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손님은 기름진 버터에 구운 뻑뻑한 고기가 익숙지 않았고 요리사는 조리 시간이 오래 걸려 바쁜 손님들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렝가테이-벽돌집’이라는 양식당을 운영하던 기다 모토지로는 1895년 일본들이 좋아하는 튀김 방식으로 조리 방식을 바꾸며 문제를 해결했다. 곁들여지는 채소도 볶음 채소에서 채 썬 양배추 샐러드로 바꿨다. 기름기도 줄이고 소화에 도움이 되는 간편한 방식으로 바꾸자 손님이 몰렸다. 긴자에 있는 그의 식당은 유명해졌고 지금도 운영 중이다.

1868년 일본이 개항한 뒤 가장 놀랐던 것은 서양인의 큰 체구였다. 서양인과 일본인이 마치 어른과 아이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큰 고민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서양인처럼 큰 체구를 갖기 위해서는 채식만으로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문명개화가 시작됐다.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문명개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영양 공급의 주재료인 소고기는 군대로 보내졌고 일반인들은 고가(高價)의 소고기 대신 값싼 돼지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1929년 궁중요리사였던 시마다 신지로는 ‘폰치켄’이라는 식당을 열고 돈카쓰를 선보였다. 3cm 정도의 두꺼운 고기를 빵가루를 입혀 튀겨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완성했다. 또 이를 먹기 좋게 조각낸 뒤 젓가락을 사용하게 하고 밥과 된장국도 곁들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늘날의 돈카쓰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돈카쓰는 ‘가미카쓰’라 불리는 종이돈카쓰이다. 어렸을 때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비싸고 두꺼운 고기도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얇은 종잇장 같은 돼지고기가 두껍게 입힌 빵가루와 튀겨져 나오면 소스와 함께 접시 바닥까지 깨끗이 청소하듯 해치웠던 기억이 있다. 그 오래된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남산의 산책로에서 얼굴만큼 큰 돈가스를 마주하곤 한다.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