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이 런칭 100일을 맞는 이 기사를 기획하던 중 김정안 채널A·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이 요즘 미 행정부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비핵화 라인에 포진한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을 함께 ‘쓰리 철’(Three chol)‘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번역 하면 ’3철‘인데 세 사람 이름 공통자인 ’철‘에 착안한 단어입니다. 애칭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김정은의 새 대미라인에 대한 미 행정부 한반도 관계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워싱턴에서는 또 최근 북한이 김혁철의 새직함, 대미특별대표직을 비건 특별대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에 대해서도 평가하는 분위깁니다. 올해 48세, 능통한 영어에 협상경험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김혁철을 ’특별대표 대 특별대표‘란 틀에 맞춰 모양새를 갖출 만큼 북한은 적극적 협상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김 전 대사는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일해온 전략통으로 분류됩니다. 박 부위원장은 대남 사업을 하는 통일전선부 출신이지만 유엔 북한대표부 참사 출신으로 미국 사정에 밝은 편입니다.
김혁철의 등장을 북한 국내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아니라 김혁철을 내세운 것은 ’최선희는 차관급이니 1급인 비건과 회담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담의 내용보다 격식을 중요시하는 고루한 북한 관료주의의 발현인 셈이지요.
북한 외무성, 특히 대미라인은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 출범 직후 시작된 1차 북핵 위기 이후 무려 26년 동안 북한 지도부가 초강대국 미국을 도발과 대화라는 2중 전술로 우롱하며 핵·미사일 개발을 강행할 수 있도록 실무적으로 뒷받침해 왔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축적된 북미회담의 역사와 핵·미사일 개발의 기술적 지식들로 무장한 채 이번 협상에서 미국이 들고 나올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다양한 대응방안을 준비해 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김혁철 등 외무성 테크노크라트들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에 대해서도 ’지적인 해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정은이 어느 정도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치적 타협을 보고 싶더라도 테크노크라트들은 조목조목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하늘과 같은 북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남북 회담의 역사 속에서 증명되는 것은 이들 테크노크라트들은 일상 생활과 의전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등 최고지도자에게 깍듯하게 충성을 보이지만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서는 ’할 말은 하라‘고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2009년 8월 묘향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배석했던 김양건 당시 통전부장은 김 위원장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남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훗날 한 당국자가 전했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금강산 관광 재개에 관한 조치들에 합의해줬지만 남측과 대화가 통하는 협상파로 알려진 김양건도 테크노크라트로서 할 말은 했던 거지요. 이처럼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즉 주인인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로 일을 하는 테크노크라트, 즉 대리인(속하게는 머슴)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국제정치학 교과서에서도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김정안 채널A·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j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