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세상에 눈뜨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구림 작가(왼쪽)와 윤석남 작가.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어느덧 팔순을 넘긴 두 예술가는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 출발도 독특했지만, 각각 실험미술과 개성 있는 회화로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은 점도 닮았다. 게다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5월6일까지 열리는 전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에 참여한 두 사람을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미 원로급에 속하건만, 두 노장은 만나자마자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윤 작가가 “김 선생님이 정통의 길을 가다 나오셨다면, 난 엉뚱한 데 튀어나온 잡초”라고 하자, 김 작가도 질세라 “나도 정통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며 응수했다. 윤 작가는 그간 “화단의 운동 자체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하니, 김 작가는 “홍대, 서울대가 끼리끼리 전람회하는 것이 안 되겠다”싶어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만들었다고 했다.
서울 뚝섬 인근 언덕을 태운 퍼포먼스 ‘현상에서 흔적으로-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년)의 사진 앞에 선 김구림 작가.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윤 작가가 그림을 시작한 계기도 드라마틱하다. 영문학로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였다. 작가는 그 날짜를 지금도 기억한다.
“1979년 4월 25일.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는 날이었거든요. 홍대 나온 후배에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못했다’고 푸념했더니, 후배가 ‘언니 당장 합시다’라고 해요. 그 길로 한 달 생활비를 몽땅 털어 그림을 그렸죠.”
어쩌면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망에 이끌린 것도 두 작가의 공통점이 아닐까. 김 작가는 “부잣집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세상물정 모르고 ‘금이야 옥이야’ 자라 고집이 세다”고 했다. 극장과 백화점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 출신으로 처음엔 외과 의사나 영화감독과 같은 다른 길을 꿈꿨다. 하지만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맘에 온전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예술가가 됐다.
어머니의 가족사진을 배경으로 만든 나무조각 ‘어머니2-딸과 아들’(1992년) 앞에 자리한 윤석남 작가.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나중엔 글도 포기하고 결혼을 했는데 2년 쯤 지나니 정신이 이상해졌어요.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었죠. ‘엄중한 세월에 한가롭게 그림을 그려도 되나’ 생각도 들었지만 견딜 수 없었어요. 예술의 복잡한 정의나 사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그리기로 했어요. 그게 ‘어머니’였죠.”
“나는 지금도 불만이 많아요. 나보다 젊은 사람도 작품이 팔리는데 나는 왜 안 될까라는 생각도 때로 합니다. 그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김구림)
“한국이란 나라가 남편을 통해 내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원해줬다 생각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운을 얻었으니 이 빚을 죽을 때까지 작품으로 열심히 갚고 싶습니다.”(윤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