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본 유학생들. 동아일보DB
한 세기 전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첫 부분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우리 유학생 600여 명이 모여 조선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 의지가 절절히 담겨 있습니다. 적발되면 고문과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침략국 심장부에서 독립 의지를 다진 겁니다.
4개 항으로 구성된 결의문을 보면 ‘전 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며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조선 민족의 책임이 아님’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2·8독립선언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내용의 ‘기미독립선언서’와 범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황금돼지해인 2019년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3대 사건인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울시는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교육청, 반크와 공동으로 ‘2·8독립선언서’를 5개 언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배포하는 등 그 의미를 되새기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2·8독립선언이 있었던 도쿄 현지에서도 8일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가슴 벅찬 장면이었습니다. 그만큼 100주년의 의미는 큽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과제도 많습니다. 1월 28일 김복동 할머니 별세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만행을 처음 폭로하고 그동안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워 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전후 독일의 반성 태도와 역사 인식을 일본이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을 일삼는 행태가 실망과 분노를 자아냅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재일 조선인 유학생과 3·1운동, 임시정부가 바란 것은 통일된 조국이었기에 아직 우리 앞에 해결되지 않은 과제도 놓여 있습니다.
때마침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한반도 해빙 기류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획기적 진전이 생겨 100년 전 외쳤던 자주, 독립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