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5화>강원 홍천군
강원 홍천군의 3·1 만세운동은 내륙에 위치해 4월에 시작됐지만 그 열기는 뜨거웠다. 4월 1일 홍천읍을 시작으로 여러 면에서 일제에 맞선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11일에는 봉화 시위가 있었다. 강원 홍천군 내촌면 동창로 기미만세공원 입구의 8열사 기념비.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공원 한쪽에 서 있는 ‘동창마을의 기미 만세상’에 새겨진 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1919년 4월 3일 정오 이 고장이 배출한 천도교인 김덕원 의사가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이날 이 거사는 온 마을을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이게 했다. 아아 어찌 잊으랴! 이날 동창마을 김덕원 의사와 함께 외친 5개 면민 수천의 피 끓는 함성과 일제 헌병의 총탄에 희생이 된 팔열사의 충혼의 넋을…! 여기 옷깃 여미며 추모한다.’
문학평론가 윤병노 교수의 글로, 당시 동창마을을 뜨겁게 달구었던 항일의 함성과 그 열기를 가늠케 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면 소재지도 아닌 이곳에서 수천 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8명이나 희생됐다는 사실이다.
기미만세공원에 모인 주민들이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3·1만세운동을 재연했다.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물걸리는 강원도 내륙 교통의 중심지로 홍천군의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그리고 인제군의 기린면과 내면 등 인근 일대를 연결해 주는 사통팔달의 요지였다. 그래서 마방(馬房)과 상설시장, 주막이 들어섰고 주변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자연스럽게 3·1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기록들에 따르면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말경 조금 늦게 시작됐다. 내륙 깊숙이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 경성(京城·서울)의 3·1운동과 이틀 뒤 고종의 인산(因山·장례)에 대한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린 탓이다. 물걸리의 천도교도인 김덕원 전성렬은 같은 교도 전우균 이문순을 연락책으로 삼아 인근 5개 면에 연락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홍천읍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마침내 약속한 3일이 되자 아침부터 사방에서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팔열각과 그 옆 다리목을 중심으로 마을을 가득 채운 인원은 최소 1000여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약방과 글방이 있던 전영균의 집에는 큰 태극기가 높이 게양됐고, 군중은 모두 손에 수기를 쥐고 있었다. 이문순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뒤를 이어 만세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이후 지금의 초등학교 뒷길을 따라 도관리 헌병주재소 헌병 7명이 헌병 보조원 홍재호 박연흥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니 시위 군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중은 남의 집으로 혹은 뒷산과 개울가로 몸을 피했지만 무참한 총격에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 현장에서 8열사가 사망했고, 20여 명이 다치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련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홍천군 전체에서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 활동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11일 내촌면 소재지인 도관리에서는 밤중에 수십 명이 산 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항일의 뜨거운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동아일보가 홍천군 홍천읍 장전평로 무궁화공원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물걸리에 앞서 홍천읍과 북방면, 동면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특히 홍천읍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17년 작고한 사학자 조동걸 교수는 저서 ‘태백 항일사(太白 抗日史)’에서 “강원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계획을 추진한 것은 횡성과 홍천읍의 경우뿐이다”며 “고종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주도됐다”고 소개했다.
고종 황제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감리교인 차봉철 서상우와 천도교인 오창섭 등 11인이 차봉철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2차례 모임을 더 갖고 역할을 분담했다. 감리교회는 홍천읍, 천도교회는 북방면을 각각 맡아 홍천읍 장날인 4월 1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기독교도들은 태극기 수기를 만들고 천도교인들은 큰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1일이 되자 홍천읍과 북방면에서 주민들이 홍천읍 신장대리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때마침 인근 농민들이 도로공사 부역으로 홍천읍에서 인제로 가는 방향으로 10리 정도 되는 곳에 동원돼 있어 부역 인부를 가장했다. 오후 1시경 기독교인이 준비한 작은 태극기들이 장꾼들에게 나뉘어졌다. 마침내 천도교인이 만든 커다란 태극기가 높이 솟아오르자 주도 인물들은 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뒤를 이어 터질 듯한 만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항일 태백사’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곳곳에서 만세를 불러 홍천읍내가 마치 독립축제의 한마당 같았다고 기록했다. 또 군청에 모인 군중, 면사무소에 모인 군중, 군수와 맞서 다투던 농민, 시장에서 독립만세의 흥겨움에 취해 여기저기 모였던 군중 등이 한마음으로 시국을 논했다고 전했다.
그날 오후 춘천에서 수비대가 도착하자 숨죽이고 있던 현지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 체포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홍천 헌병분견소로 밀고 나아갔지만 일제의 총칼 앞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시위대 일부(33명)가 체포되면서 해산했다.
동면의 만세운동은 민씨 문중이 계획했지만 면민이 대거 참가했다. 4월 2일 만세시위로 기세가 오른 만세군중은 3일 홍천읍으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일제 헌병과 수비대가 나타나 대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민병숙 민병태가 일제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다 총탄에 희생됐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면사무소를 부수며 맞섰지만 일제의 총탄에 밀려 물러나고 말았다.
홍천읍 장전평로 무궁화공원에는 또 다른 ‘3·1운동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동아일보가 일제 총칼의 위협에도 뜨겁게 맞섰던 홍천군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9년 세운 것이다.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으로 곧고 꿋꿋한 대나무의 이미지를 살려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현했다. 홍천향토사료관 향토해설사 허병직 씨는 “홍천은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은 물론이고 6·25전쟁의 격전지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護國) 의식이 치열했던 곳”이라며 “지리적 위치 때문에 3·1운동이 뒤늦게 시작됐지만 그 열기는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뜨거웠다”고 말했다.
▼ “조상들의 3·1운동정신 잘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 ▼
김창묵 동창만세기념사업회장
김덕원 의사(작은 사진)를 추모하는 김창묵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 홍천=김동주 기자zoo@donga.com
―김덕원 의사에 대한 기억은….
“김 의사 직계는 아니지만 손자뻘이 된다. 6세 때 뵌 기억이 있다. 산골 오두막에 살고 있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어떤 말씀을 들었나.
“어릴 때라 많은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이 나라 동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나라 잃은 민족이 죽어야지 살아야겠냐’라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말씀은 생생하다.”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나라의 풍요가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다. 조상들이 흘린 피와 땀이 바탕이 됐다. 이 정신을 잘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
―수목원에는 김 의사뿐 아니라 여성 의병장 윤희순 비 등 다른 기념물도 많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등과 관련한 조형물들도 있다. 방문객들이 힐링은 물론이고 나라를 지킨 조상의 민족정기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원을 조성했다.”
―3·1운동 기념사업뿐 아니라 많은 기부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절이 어려워 나는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대신 여러 대학의 최고위 과정 자격은 많다(웃음). 배움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더라. 우리 역사의 정신을 제대로 전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다는 게 결론이었다. 밥만 먹고 똥만 싸다 갈 수는 없지 않나.”
홍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