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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봐 쏴봐”… 학생들, 日警 총부리 앞서 가슴 풀어헤치고 항거

입력 | 2019-02-16 03:00:00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6화>군산 만세운동




3·1운동이 전개된 군산 시가지 전경(1945년 8월 촬영). 평지에 네모반듯하게 도로를 조성한 곳(사진의 오른쪽)은 일본인이 주로 거주했고, 한국인들은 평지에서 쫓겨나 언덕배기 비탈진 곳의 허름한 초옥에서 생활했다. 구암동산 정상에 건립된 군산 3·1운동 기념 조각상(왼쪽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제공·군산=안영배 논설위원

강물이 유유히 흘러 서해에 닿는 광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북 군산 금강 하구언에 위치한 구암동산(해발고도 34m). 3·1운동역사공원이 조성된 이곳에는 지난해 6월 개관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호남 최초 3·1만세운동을 벌인 영명학교(군산제일고 전신)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당시의 서양식 3층 건물로 외관을 꾸몄다.

영명학교는 1903년 서양인 선교사가 구암동산 자락(당시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군산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호남지역 명문학교로 이름을 떨친 이 학교에서 서해 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옛 군산항과 뜬다리(물 수위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는 다리) 부두가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군산항에는 늘 포개진 쌀가마들이 산처럼 쌓여 장관을 이뤘다. 일본 오사카 등지로 반출되던 쌀이었다. 당시 군산항은 전국 제1의 미곡항(米穀港)이자, 일제의 쌀 수탈기지였다. 영명학교의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은 이를 지켜보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하순 학교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군산경찰서의 일본 순사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군산에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반일감정의 온상’으로 지목해온 영명학교를 주시했기 때문이다(‘군산제일100년사’).

이 정보는 정확했다. 그해 2월 26일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김병수가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모부 박연세를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달했다.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며, 자신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당시 세브란스병원 제약실 근무)으로부터 군산지역 연락책임자로 임명됐다는 내용이었다.

“경성에서는 (고종)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지요?”(박연세에 대한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 신문 조서)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받듯 이렇게 물은 뒤 경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 90여 장을 건넸다. 박연세는 “경성에서 일이 그렇게 벌어진다면 이곳에서도 동시에 운동을 개시하겠다”고 화답한 뒤 교사들(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인묵 이동욱 김윤실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삼남(영남, 호남, 충청) 지방 최초의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 일경의 허를 찌른 3·5만세운동

박연세 등은 3월 6일 군산 서래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준비에 나섰다. 영명학교 남학생들과 영명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멜본딘여학교의 학생들, 같은 선교재단인 구암예수병원의 직원들도 동참을 약속했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밤을 도와 학교 지하실과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7000여 장을 등사했고, 멜본딘여학교 학생들은 교내에서 일본인 선생들의 눈을 피해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학교 병원 등에 밀정을 심어뒀던 일경(日警)은 거사 이틀 전인 4일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5일 오전 영명학교를 급습했다. 10여 명의 일본 순사들은 증거물들을 찾아냈고, 거사를 주모한 교사들을 연행하려 했다.

이때 영명학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위협을 느낀 일본 순사들은 총을 뽑아 공포탄을 쏘며 물러서라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쏴 봐, 쏴 봐”하며 가슴을 풀어헤치는 등 대항했다. 일경은 결국 박연세, 이두열 두 교사만 연행해 가는 데 그쳤다(1919년 윌리엄 불 선교사의 비밀 보고서).

거사의 주역들이 체포되자 만세운동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교사 김윤실이 교사들과 학생들을 긴급 소집했다. 모임 참가자들은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으고 당일(5일) 오후 일경의 허를 찔러 거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들, 병원 직원, 구암리 주민 등 14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는 군산부 내 본정(本町) 큰 거리에 이를 때쯤 500여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한 뒤 체포 교사 석방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예상치 못한 시위와 시위대 규모에 크게 당황한 일경은 인근 익산 헌병대까지 동원한 뒤 무차별 총격과 함께 시위대 탄압에 나섰다. 이날 체포된 한국인은 90여 명에 달했다.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군산의 3·5만세운동은 이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군산제일100년사’).

○ 청년 노동자들이 일어서다

하지만 한번 켜진 만세운동의 불씨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한병합기념비(日韓倂合記念碑)에 쇠똥을 바르고 길바닥에 독립만세를 대문짝만하게 쓰는 등 일제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군산 거주 일본인들이 대응하기 시작했다. 재향군인회 소속 일본인 200여 명은 매일 밤 3교대로 순찰을 돌고, 화재진화용 쇠갈고리로 무장한 소방대원들은 일본인 주택과 상점에 대한 경비를 섰다. 대농장주들은 치안 유지 경비에 보태라고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일경도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공포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산 주민들은 꺾이지 않았다. 당시 잡화상을 하던 청년 권재길은 3월 8일 “우리 일반 청년 및 노동자들은 궐기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어찌하여 궐기하지 않는가”라는 문서를 작성한 뒤 군산지역 학교에 뿌렸다. ‘구암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이 글을 받아본 군산공립보통학교(군산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이에 호응했다(‘권재길 등 판결문’). 18, 19세의 보통학교 상급생들은 3월 14일 독립운동 격문을 첨부한 퇴학계를 작성해 학생들에게 배포했고, 70여 명이 퇴학원을 내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보통학교 상급생들은 같은 또래의 노동자들과 연대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미소 종업원 이남률, 김수남 등 청년 노동자들도 이에 가세하기로 했다. 청년 및 학생들은 군산항 부두로 나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또 군산부 노동조합 사무실과 강호정(江湖町·현 죽성로) 거리 등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나눠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

하지만 두 번째 독립만세운동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학부모를 동원해 자퇴한 학생들을 회유해 없던 일로 처리한 것이다. 이남률과 김수남은 만세운동을 방해한 공립학교의 조치에 크게 분개했다. 3월 23일 오후 8시경 두 사람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식민지 교육의 온상인 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화염병을 던져 군산공립보통학교 시설 일부를 불태워 버렸다. 군산지역에선 이 사건을 제2의 군산 만세운동으로 여긴다(‘군산제일100년사’).

○ 인근 호남·충남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

군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영명학교와 학생들(왼쪽 사진). 지난해 6월 영명학교가 자리잡았던 구암동산에 옛 영명학교 건물 외관을 재현해 개관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제일고 제공·군산=안영배 논설위원

학교가 불탄 지 일주일이 지난 3월 30일 밤, 군산에선 세 번째 만세운동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한밤중 횃불 시위였다. 수천 명의 군중이 횃불과 등불을 들고 군산경찰서와 재판소 앞에 모여들었다. 군중은 “만세운동은 빼앗긴 국권을 도로 찾으려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구속하고 형을 선고하는 것이냐”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다음 날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에서 열릴 영명학교 만세운동 참여자 30여 명의 재판을 염두엔 둔 시위였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사태 확산을 두려워한 일경은 무자비한 탄압을 벌인다. 헌병대 군인과 경찰이 총을 쐈고 칼을 휘둘렀다. 여기에 일본인 재향군인회와 민간인들도 가세해 목총과 칼로 비무장이었던 한국인들을 무차별로 살상했다. 군산시내가 피로 물들었다.

이튿날 개최된 재판의 파행은 예고된 일이었다. 영명학교 만세운동 주도자들이 재판정으로 들어오는 순간 재판정을 가득 메웠던 방청객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고, 재판정을 순식간에 만세운동 장소로 바꿨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됐고, 만세운동 참가자 전원(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19년 3월 한 달간 세 차례에 걸쳐 군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굴곡을 겪었다. 하지만 이후 호남과 인근 충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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征韓派 고장 야마구치현 이주민들 고리대금업 하며 농지 마구 수탈
채만식 소설 ‘탁류’서 피폐상 드러나


군산항에 산처럼 쌓인 쌀가마 더미. 한국에서 생산된 쌀은 큰 기선에 실려 일본 오사카 등지로 반출됐다. 동아일보DB

일본식 주택과 일제강점기의 근대 문화 유적들로 유명한 전북 군산은 1899년 외국인들에게 개항됐다.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땅’이었다. 땅이 비옥한 데다 땅값도 일본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군산 일대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뒤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호남평야의 황금물결이여/구치(조선 쌀)는 100척이고 1000척이 실려 오사카, 도쿄까지도/어머나, 군산은 멋진 항구”라며 군산을 찬미하는 노래(군산 속요)까지 불렀다.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정치적 고향이자 정한파(征韓派)의 근거지인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한국 진출에 적극적이었고, 토지 확보를 위해 탈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수많은 한국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군산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인은 갈수록 늘어났다. 3·1만세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군산 거주자(1만3604명)의 절반 이상(6806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을 ‘쌀의 군산’이라 부르며 제2의 고향이라 여기고 영원히 정착하길 바랐다. 만세운동 탄압에 일본 민간인들이 적극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인 대농장이 많아질수록 한국 농민들은 몰락했다. 청년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매갈잇간(도정공장)의 매갈이공으로, 부녀자들은 쌀을 고르는 정미소 미선공으로 내몰렸다. 쌀을 배에 실어 나르는 인부나 인력거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언덕 비탈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집에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아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당시 군산 거주 한인들의 피폐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군산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정미소 노동자 파업(1924년), 옥구농민 소작 쟁의(1927년) 등의 반일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군산=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