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인화성 물질 뿌리고 불질러… 방마다 설치된 스프링클러 작동 옷장 조금 태우고 바로 꺼져… 화재경보기도 울려 추가피해 막아
16일 오전 2시 48분경 서울 광진구 화양동의 A고시원 404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입주자 박모 씨(74)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바닥에 휘발유로 추정되는 물질을 붓고 불을 질렀다. 입주자 대부분이 잠든 새벽이어서 자칫 피해가 커질 수도 있었지만 박 씨를 제외한 나머지 입주자 33명(건물주 부부 2명 포함)은 모두 무사했다. 지난해 11월 9일 오전 5시경 전기난로에서 시작된 실화로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5층 건물인 A고시원 입주자 33명의 목숨을 구한 건 건물주 김모 씨가 자발적으로 설치한 스프링클러였다. 다중이용시설의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한 소방법은 2009년 7월 개정됐다. A고시원은 2004년 지어져 스프링클러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 씨는 2011년 자비 3000만 원을 들여 33실에 모두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404호에서 화재가 시작되자마자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주변으로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김 씨는 17일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의무는 없었지만 건물 안전을 생각해 자발적으로 설치했다”고 말했다. 광진소방서 관계자는 “옷장과 옷가지만 조금 탄 정도이고 불길이 바로 진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1983년 지어진 종로 국일고시원 건물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아 화재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고시원 주인이 2015년 서울시의 노후 건물 스프링클러 설치 지원사업에 신청해 선정됐지만 건물주가 반대해 무산됐다. 당시 스프링클러만 설치돼 있었다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A고시원 건물주는 2004년 건물을 지을 당시 모든 방에 경보기를 설치했다. 화재가 난 404호 옆방 주민은 “새벽에 자다가 방 안에 설치된 화재경보기가 시끄럽게 울려 잠에서 깼다”며 “1, 2분간 경보기가 계속 울려 복도로 나갔더니 4층 거주자들이 거의 다 밖에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5층에 사는 건물주 김 씨는 화재경보를 듣자마자 바로 4층으로 내려와 자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화재는 거의 다 진압된 상황이었다. 방화 후 흉기로 자해를 한 박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김재희 jetti@donga.com·이윤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