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
내겐 글을 시작하기 전 뭉그적거리는 버릇이 있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촌각을 다툴 때도 그렇다. ‘뭉그적거리는 시간’은 에너지가 싹트는 시간이다. 밥할 때 뜸 들이는 시간 같은 거냐고? 그보다는 목욕탕에서 때를 밀기 전 물에 몸을 불리는 시간과 가깝다. 마음을 고백하기 전 이쪽저쪽으로 굴려보며, 마음 둘레에 근육이 붙을 때까지 공글리는 일에 가깝다. 혹은 강아지가 뱅글뱅글 돌며, 똥 눌 자리를 고르는 일과도 비슷하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에 앞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알맹이가 ‘스스로 나오고 싶어질 때’ 말이다. 가령 글을 쓸 때 ‘쓰고 싶은 마음’이 안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길, 종이 위로 글자들이 뛰어내릴 준비를 마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야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편안한 글이 태어난다.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랩걸’을 읽다 씨앗의 기다림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탄복했다. 어둠을 자궁 삼아 웅크려 있었을 100년의 기다림! 어느 연꽃씨앗은 싹을 틔우기까지 ‘중국의 토탄 늪에서 2000년’을 기다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시작하기 위해 2000년이 필요한 존재도 있다. 그에게 2000년은 죽은 시간이 아니라 ‘나아가는 시간’이었으리라.
이유가 없어보일지라도, 이유가 있다. ‘아직’이라는 씨앗은 ‘기어코’라는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기다림의 순정에 머무를 수 있다면!
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