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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발포로 평양서 5명 숨져… 은폐 지시에 총상 보고 못해”

입력 | 2019-02-18 03:00:00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백년 만의 귀환: 3·1운동의 기록
국사편찬위-본보 27일 3·1운동 100주년 학술회의
<1> 3·1운동 첫날부터 강경 탄압




일제의 발포 건수가 전국적으로 24건에 이른 1919년 4월 1에는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헌병이 만세시위대에 발포하고,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순국한 이가 19명에 이르는 등 일제의 탄압이 극에 이르렀다. 다음 사진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시위대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미국 영사관(덕수궁 선원전 터)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는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광명정대하게 밝혀라.”(기미독립선언서 중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는 질서 있는 만세시위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평화로운 시위 군중을 향해 3·1운동 첫날부터 군대를 투입해 총을 발포하여 피를 흘리게 했고, 착검한 소총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이나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잔인하게 탄압했다. 당시 끔찍했던 상황은 평양의 3·1운동 시위 상황을 기록한 선교사 보고서에 기록됐고, 일제 문서에서도 확인됐다.

“(3월 1일) 군중은 저녁에 다시 나가 행진했는데 군인들이 총을 쐈고 3명이 총에 맞았다.” “교사 한 명이 총검에 심하게 찔렸고, 여러 학생들이 총검에 찔리고 총대로 맞고 몽둥이에 맞았다.” “(3월 3일) 군인들이 착검한 채 달려들었고…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고 사람을 차고 짓밟고 때려 쓰러뜨렸다.”

국사편찬위원회 구축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평양 서쪽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는 3월 4일 헌병이 시위대에 발포해 58명(임정 자료·일제 집계는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북쪽 맹산군 맹산면에서도 10일 일제 집계로 시위대 54명이 사망했다. 국편DB를 분석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만세시위에 굉장히 당혹한 일제는 시위 초기부터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며 “발포와 같은 강경 진압이 격한 시위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압으로 시위의 격렬함이 줄어들었는데도 일제의 발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1919년 4월 4일 이후 시위대가 헌병 주재소 등을 파괴하거나 군경을 처단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의 발포 건수는 4월 5∼8일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하고 22일까지도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시위의 양상과 관련 없이 증가하는 발포 건수는 3·1운동을 압살하려는 군경의 진압정책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국편DB가 현존하는 각종 사료를 거의 망라해 종합했기에 가능했다. 첫날 평양 시위의 일제 발포도 기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일일 보고 등에는 첫 발포가 3월 3일 벌어진 것으로 나타나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국편DB를 통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일별조표’와 선교사 보고 등 여러 사료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을 확정할 수 있게 됐다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는 일제가 도검(36건)이나 갈고리·곤봉(9건), 기타 무기를 사용해 진압한 사건도 모두 46건이 발견됐다. 일제가 축소 보고한 결과여서 실제론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3월 1일∼4월 22일 국내 만세시위 1552건 가운데 시위대가 군경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사건은 약 132건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양상을 보면 군경이 총을 쏘자 시위대가 산에서 나무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거나 돌을 던지는 식이지, 처음부터 낫이나 죽창 등 살상용 무기를 준비한 공세적 시위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국편DB 분석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최소한 5828명의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사망 1510명에 부상 2614명이고, 사망인지 부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피해자도 1704명이다. 이는 일제 조선헌병대사령관 보고(1920년 1월)보다 3800여 명이 더 많은 수치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는 3·1운동 사망자만 7509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일제는 한국인 피해를 축소 보고했고, 이번 분석에도 ‘수명’ ‘수백 명’ ‘다수’ ‘소수’ ‘약간’ ‘있음’ 등으로 기록돼 수치 산정이 어려운 자료는 제외했기에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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