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모독’ ‘김원봉 논란’ ‘일왕사죄’… 나라 안팎에서 역사문제로 파열음 내 편의 결집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적 왜곡 갈수록 불거질 듯 역사의 정치적 도구화 경계해야
고미석 논설위원
1930년대 집시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이 서울 도심의 KF갤러리에서 사진으로 재현 중이다. ‘이웃하지 않은 이웃’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관습적 편견과 환상을 배제하고 그들의 실상을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독일 사진가인 한스 벨첼이 유럽의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집시의 삶을 따스한 눈으로 기록한 사진들 속에 미소 짓는 여인은 훗날 강제수용소에서 가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집시는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유대인처럼 소리 높여 끈질기게 피해를 주장하지도 못한 희생자.
그들과 우정을 쌓았던 벨첼은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가해자 편에 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시들의 쉰들러’ 역할과도 거리가 멀었다 한다. 그 행로를 어느 시기, 어떤 관점으로 조망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엇갈릴 터다. 시대격변에 휘말린 한 사람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과정인지 성찰하게 된다. 인물의 공과를 신중하게 판단하기보다 부정적 일면만 꼬투리 삼아 흑백논리를 들이대는 부박(浮薄)한 사회에서는 간단한지 몰라도.
역사 문제의 불똥이 나라 안팎에서 번져간다. 한편에서 5·18 모독 발언과 월북한 김원봉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왕 사죄’ 발언으로 그러잖아도 악화된 한일관계가 얼어붙었다. 나라 밖에서 보면 온통 과거에 사로잡힌 국민들로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근거리 역사를 입맛에 맞춰 재단하려는 행태는 좌우가 따로 없어 보인다. 정치에서의 반일감정 자극이야 수시로 되풀이되지만, 입법부의 수장이 외신 인터뷰에서, 그것도 한국에 친밀감을 표시해온 일왕을 향해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란 자극적 표현을 새삼 들고 나선 까닭이 알고 싶다. 길게 봐서 과연 우리에게 어떤 득이 있는지 궁금하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쓴 에르네스트 르낭은 일찍이 간파했다. 민족을 앞세우는 애국주의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일본 정부가 아무리 부정해도 과거 아시아에 끼친 재앙과 가해 책임은 면죄받을 수 없다. 캐나다 출신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는 말한다. 일본은 원폭 투하 사실을 이용해 스스로를 희생자로 그려냈다고. 저자는 일본 외에도 많은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우리 편의 결집을 이끌어내기 위해 역사를 어떻게 오남용했는지를 일깨운다. 주로 과거에 대한 거짓말을 꾸며내거나 하나의 관점만 강조해 역사를 악용하는 수법이다. 신생 정권들이 과거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런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역사의 이름 아래 거창한 주장을 내걸거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이는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랴. 그게 대중에게 먹혀드니 말이다.
5·18 유공자인 여당 대표는 광주의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정말로 죄 받는다”고 일갈했다. 어디 광주의 비극뿐이랴. 역사를 정치적 도구화하는 모든 오남용은 새로운 죄를 잉태하는 작업 아닐까. 맥밀런은 역사의 바른 사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작심한 것을 정당화하려고 과거의 근거를 입맛대로 취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기만할 수도 있다.’
100년 전 3월 1일, 이 땅에서 뜨겁게 울려 퍼졌던 함성의 물결을 진정 소중히 기억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보다 진중할 필요가 있다. 그날을 살지 못한 사람들이 오늘 저마다 과거사를 논한다. 100주년 기념 특별 멘트도 경쟁적으로 쏟아질 터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국내용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3·1절은 늘 현재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