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그래서 맞춤법에 대한 불만도 많다. 맞춤법이 일관성 없게 변화된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생긴다. 규범이 바뀌면 더 복잡해진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서를 다루는 일을 해서 맞춤법에 민감하다면 더 화가 날 수도 있다.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항의할 만한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부분은 맞춤법이 달라지게 하는 힘은 우리가 쓰는 말에서 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는 말이 실제 언어이고, 규범은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다.
●이 자리를 (빌어/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괄호 속에 알맞은 말은 ‘빌려’다. 그런데 ‘빌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왜 그런가. 잠깐 과거로 돌아가 보자.
●그즈음 아버지가 부산 감옥소에 갇혀 버리자 빌어 살던 방
한 칸마저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게 된 우리 식구를 자기 움막에
같이 살게 해주었다. (‘노을’·김원일·1978년·문학과지성사)
한 칸마저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게 된 우리 식구를 자기 움막에
같이 살게 해주었다. (‘노을’·김원일·1978년·문학과지성사)
그래서 현재 우리가 쓰는 ‘빌다’는 아래처럼 정리된다. 이 말이 어떤 단어와 함께 쓰이는가를 봐야 한다. 그래야 진짜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잘못을 빌다 → 사죄하다
●소원 성취를 빌다 → 기도하다
●양식을 빌다 → 구걸하다
●소원 성취를 빌다 → 기도하다
●양식을 빌다 → 구걸하다
우리 국어에 대해 갑론을박할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언어는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맞춤법을 수정하는 방식에는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것과 남이 말하는 것이 정확하게 같은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소통하며 산다. 그 소통이 올바르려면 우리의 언어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우리의 규범에 대한 이런 관심은 적어도 열린 마음으로 그 소통의 장에 접근한다는 증거이니 분명 기쁜 일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