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이끌다 징역 1년6월형 갓난아이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파주시, 생애 다룬 창작극 제작나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수감자 카드에 실린 임명애 독립운동가의 모습. 파주시 제공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파주의 첫 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앞장섰던 사람은 임명애(1886∼1938)였다. 구세군 교인이었던 그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임명애의 외침에 따라 학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파주의 여성 독립운동가 임명애의 생애를 담은 창작 뮤지컬이 제작된다. 파주시가 추진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다.
임명애의 이름은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3월 25일 와석면 시위가 임명애의 집에서 기획됐다. 그해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 학생 김수덕, 농민 김선명과 함께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는다. “임명애는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생도들을 선동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 … 격문을 배부해 자기 면민들과 조선 독립운동을 하려고 꾀하여 이날 소관 관청의 허가를 얻지 않고서 불온문서를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그 지방의 정일을 깬 자”라는 게 이유였다. 염규호 김수덕 김선명은 징역 1년 형에 그쳤지만 임명애는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는 판결에서 일제가 그만큼 임명애를 위력적으로 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명애가 투옥된 곳은 서대문형무소 8호방이다.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과 어윤희 권애라 심명철 등 주요 여성 독립운동가가 수형생활을 하던 그 장소다. 수감 당시 만삭이었던 임명애는 복역한 지 한 달 만에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했다가 아이를 낳고 11월에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됐다. 남편 염규호도 복역 중이었기에 가족이 모두 감방에서 생활하는 셈이 됐다. 이에 8호방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산모에게 밥을 나눠주고 기저귀를 말려주면서 함께 아기를 돌봤다.
1921년 4월 만기 출소하면서 임명애는 고향에 돌아왔고 193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조선 독립은 그의 사후 7년 뒤 이뤄졌다.
파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