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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게임의 결말…‘우주의 기운’이 돕고 있다? [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9-02-20 14:04:00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정상회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탑승한 ‘에어포스 원’은 26일 경 하노이에 도착할 예정이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두 정상의 숙소와 회담장에 대한 준비도 분주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늘 그렇듯이 김 위원장이 언제 무엇을 타고 하노이로 향할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26일을 전후해 베트남과 양자회담을 할 것이라는 ‘설’ 정도가 돌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일 한미 정상이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지난해 9월 이후 170여일 만에 이뤄진 통화이고,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G-20 정상회담 이후 첫 직접 ‘커뮤니케이션’입니다.

● 경협 떠맡겠다는 文

‘오랜만에’ 이뤄진 통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다 당신의 지도력과 확고한 의지 덕분”이라는 트럼프 추켜세우기 발언을 이번에도 빼놓지 않은 문 대통령은 “비핵화 조치를 견인하기 위한 상응조치로 한국의 역할을 활용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고 청와대가 밝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남북경협비용 부담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 제공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남북사이의 철도·도로연결부터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김의겸 대변인의 공식발표입니다. 하지만 행간에는 몇 가지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대한 상응조치로 대북제재 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계산’이 빠른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재정부담이 생기는 대북경협에 주저할 것이라는 추론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돈은 우리가 댈 테니 대북제재 완화라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비핵화에 진전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논리를 폈을 수도 있습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징검다리로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을 끌어내야 하겠다는 절박감도 묻어납니다. 아직 협상이 타결된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경협보따리를 언급한 것은 일종의 ‘조바심’을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핵화 시간표도 없다는 트럼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만만디’ 작전입니다. 문 대통령과 통화한 직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말을 5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지난 16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테스팅(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을 포함해 부쩍 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는 발언을 자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우주군 창설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일주일 여 앞으로 다가온 회담을 앞두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특유의 협상술 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이번 회담에서 이른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이뤄내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날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보게 될 것이라면서도 “나는 긴급한 시간표(pressing time schedule)는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의 2박 3일 평양 담판이후 나온 것이어서 현재 진행 중인 비핵화 기류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엇박자의 데자뷔

관건은 회담직전 한미정상간 통화의 시그널을 북한이 어떻게 읽느냐 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현재의 국면을 설명하자면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제재를 마지막 지렛대로 북한의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은 영변핵시설에 대한 초기초치 등으로 대북제재 완화를 끌어내기 위해 협상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경협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밝힌 것은 미국과의 대북압박 공조에서 이탈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앞서 대선후보를 지낸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과 외교위원장출신인 로버트 메넨데즈 상원외교위 민주당 간사가 성급하게 대북제재에 나설 경우 한국기업과 은행들이 제재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두 의원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 재벌기업 총수들을 대동하고 방북해 금강산 관광재개 등을 논의한 점, 유럽순방 도중 제재완화를 설득한 점 등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 재무부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예치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 통치자금 2500만 달러에 대한 제재해제를 강력 요구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미국 정부와 한미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30년 게임의 결말…‘우주의 기운’이 돕고 있다?


아시다시피 북핵문제는 1990년대 이후 우리를 가장 괴롭혀 온 망령 같은 존재입니다. 역대 정권이,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30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해결은커녕 오히려 상황이 악화돼 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일조일석’에 문제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하다는 말이 이성적인 분석일 겁니다.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1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화정국가대전략월례강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4년 반 가까이 주미한국대사를 지낸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반평생을 북한 연구에 매달린 연구자 로버트 칼린을 인용해 “지금처럼 우주의 별들이 지금처럼 우리에게 유리하게 배열(alignment)된 적이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18일 화정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서의 발언입니다.

실제로 북핵외교가에는 수십 년간 돌다리 두드리듯 협상을 해봤지만 진전을 이루지 못했던 상황에 급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도 나돕니다. 즉흥적이지만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트럼프와 김정은의 담판이 오히려 ‘천재일우’의 북핵문제 해결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들립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북핵문제 해결의 최대 수혜자는 한민족이 될 것이고, 북핵문제 타결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회담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의 결단 이외에도 많은 조건이 갖춰져야 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한국 정부의 조바심이 일을 그르쳤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