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형석 칼럼]인문학에 조국의 미래가 달렸다

입력 | 2019-02-21 03:00:00

과거에는 존재하던 수천 종의 언어, 지금은 사라지거나 강대국에 흡수
문화권의 힘은 결국 인문학이 결정
아시아선 中-日 언어문화 영향력 커져
훗날 한글과 한국의 운명은 무엇일까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사상을 갖고 산다. 그 생각과 사상을 유지하고 전달하는 도구가 ‘말’이다. 언어가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동물들은 감정을 표출하는 소리는 있으나 개념을 갖춘 언어는 없다.

인간의 삶이 다양한 것같이 말의 종류도 수없이 많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수천 종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추산한다. 그런데 그 언어가 점차 사라져 간다. 씨족이나 부족의 언어가 민족의 언어로 통합되기도 하고, 인도나 중국 같은 방대한 사회의 여러 언어가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다. 문화권이 하나가 되면서는 언어도 동일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교통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역할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이런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 두드러진 현상은, 문자를 갖추지 못한 말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원주민들도 자기들의 언어가 있었다. 그러나 문자가 없기 때문에 말은 점차 사라져 간다. 얼마 지나면 중국 문화권으로 흡수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여러 민족이 문자가 없기 때문에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한글(문자)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중남미의 여러 국가 원주민들이 유럽언어 문화권으로 흡수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몇 세기가 지나면 문자를 동반하지 못한 언어는 소멸될 것이다.

또 문자와 언어가 있더라도 그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따라 언어의 세력도 약화될 수 있다. 네덜란드의 학자가 연세대에 온 적이 있었다. 그 교수는 저서를 남길 때는 영어를 사용했다. 모국어로 출판하면 독자를 넓혀갈 수가 없고 번역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문화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다. 그러나 스위스의 언어와 문자가 없기 때문에 독일어 문화권이나 프랑스어 문화권에 속한다. 최근에는 영어 문화권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내가 학생 때만 해도 대표적인 외국어는 세 가지였다. 비즈니스와 금융계를 위해서는 영어, 예술가나 외교관에 뜻을 둔 사람은 프랑스어, 과학이나 의학을 공부하는 데는 독일어가 선택과목이었다. 스페인어와 중국어는 많은 인구를 차지했어도 문화적 영향력이 작았기 때문에 높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지금은 영어가 국제어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인문, 사회, 정치, 외교 모든 분야에서 영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시아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인구가 많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는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일본어 문화권도 국제적 영향력을 넓혀갈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한국어 문화권이 아시아의 미래를 어느 정도 이끌어 갈지가 남은 숙제다. 만일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문화도 소멸됐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정신적 문화권을 주도해 가는가. 자연과학이나 기계문명은 국제적 공통성을 갖는다. 국가적 특수성이 없다. 한국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국제적 업적 창출에 기여할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어 문화권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권에 동참하는 방도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이다. 예술을 포함한 정신문화의 특수성이다. 문화를 창조하는 교육을 강조하고 독서하는 국민이 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철학과 사상, 문학적 창조성, 민족적 개성을 지닌 예술 활동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노벨 문학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의 가치가 최선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긴 역사가 지난 후의 조국의 운명을 생각해 보자.

지금의 강대국들은 로마의 후예로 남을 수 있으나, 정신문화를 창조해 남겨주는 나라는 아테네와 같은 문화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나 대학과 정신문화의 책임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정치나 경제는 소중하나 그 자체는 인간 생존의 목적이 아니다. 문화사회의 가치는 인문학에서 평가됨을 명심해야 한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