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그의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가 있다. 천도교와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1861∼1922·사진)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 주석은 해방 뒤 환국하자마자 우이동 의암 묘소를 찾았고, 이승만 대통령도 두 차례나 방문했다. 정부에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문재인 대통령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종단 지도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의 대통령 방문 요청이라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 때도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 의장으로 KCRP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김희중 대주교는 미루어 짐작할 때 난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요즘 KCRP는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물론이고 종교계의 남북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소속된 가톨릭은 3·1운동에서 일부 신자의 참여를 빼면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의암은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치료받던 중 세상을 떴다.
열강이 앞선 과학기술과 종교, 무력을 앞세워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이른바 서학(西學)에 맞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건 동학(東學)의 운명은 파란만장했다.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가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처형된 데 이어 2세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해월의 별명은 ‘최 보따리’였다. 농민군이 일제와 관군의 총칼에 밀려 패배하고 동학이 불법화된 가운데 그는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도록 괴나리봇짐을 메고 다니면서 무려 36년간 삼남(三南) 일대를 돌며 도피 생활 속에 교단을 정비했다.
서학과 동학, 가톨릭과 천도교의 운명은 3·1운동 이후 100년이 흐르면서 극명하게 갈렸다. 지난해 나온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581만 명에 이른다. 천도교는 교단 측에서 교인 수를 밝히기를 꺼릴 정도로 위축됐다. 그 대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교인 수가 남북 300만에 이를 정도로 최대 종교였다. ‘동학, 천도교 하면 대대손손 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탄압당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 대주교가 20일 한국 가톨릭교회의 반성을 담은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톨릭이 우리 역사에 진 빚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김 대주교는 이 담화에서 조선 후기 혹독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천주교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음을 전제하면서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밝혔다. 개신교는 지난해 여러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모여 일제강점기의 신사 참배를 회개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진 바 있다.
지난해 10월 문 대통령의 바티칸 미사 참석과 TV 생중계가 논란이 됐다. 한반도 평화라는 취지가 있지만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다른 종교계에서는 불편한 기색도 내비쳤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동학, 천도교에 적지 않은 역사의 빚을 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의암 묘소 참배는 어색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종교를 떠나 우리 역사의 짐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무겁게 져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찾는 것은 논란이 될 일이 아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