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그중에서 변덕이 심하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신이 있다. 바람의 신인 영등할머니다.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루에 지상으로 내려와서 각 가정에 2, 3주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간다. 음력 이월은 꽃샘추위와 꽃샘바람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다. 이러한 기상현상을 초자연적 존재가 부리는 힘에서 원인을 찾았다. 영등할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따뜻한 바람을 몰고 왔다가 딸과 함께 차가운 바람을 몰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꽃샘추위가 지나면 봄바람이 부는 현상을 그렇게 인식한 것이다. 혹은 영등이 내려올 때 바람이 불면 딸을, 비가 내리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여겼다. 딸과 함께 올 때는 바람이 치마를 찰랑거리게 하여 예쁘게 하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치마가 비에 젖어서 누추하게 보이도록 한다는 생각이다. 심술궂은 꽃샘바람의 속성을 빗댄 것이다.
오랜 세월 기세등등하던 영등할머니도 사람들의 외면에 힘을 잃었다. 몇 년 전 울산의 어촌을 조사할 때다. 울산 제전마을의 김모 할머니(76)는 시집와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영등고사를 지냈다. “영등을 모셨으면 해를 거르지 말아야지. 소홀히 대접하거나 이유 없이 제(祭) 지내는 걸 중단하면 집안에 큰일이 나. 영등할머니는 심술궂고 변덕이 심해 해코지를 피할 수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김 할머니조차 더 이상 영등고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영등고사를 지내기 전날 김 할머니는 떡과 각종 나물을 준비했다. 이월 초하루 새벽에 음식을 차리고 영등할머니를 떠나보냈다. “몸이 성치 않아서 마지막으로 모십니다. 할머니 잘 계시소.”
사람들이 줄줄이 작별을 고하니 영등할머니는 갈 곳을 잃었다. 영등을 모셨던 사람들이 노쇠해짐에 따라 영등할머니의 영험도 희미한 흔적이 되고 있다. 올해는 영등할머니가 머물 곳이 제전마을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이월 초하루, 바람의 신은 어느 마을을 헤매고 다닐까.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