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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의 갯마을 탐구]〈22〉고마웠소 영등할머니, 잘 계시소

입력 | 2019-02-22 03:00:00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그러하듯 우리의 토속 신도 변덕을 부린다. 치성을 드리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불러온다. 그래서 정성껏 굿을 하고 당산나무에 제를 지내고 성주신을 안방에 모셨다. 우리는 그런 신들과 공존해 왔다. 사람들에게 절대 권위를 가졌던 신이었으나 이제 그 힘이 역전됐다. 사람이 신을 외면하고 있다. 주민들이 정성을 다하던 마을 제당은 발길이 끊겨서 폐허가 되고 부엌의 조왕, 변소의 측신, 장독대의 철륭, 우물의 용왕, 대문의 문신, 땅의 신인 터줏대감을 모시는 집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그중에서 변덕이 심하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신이 있다. 바람의 신인 영등할머니다.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루에 지상으로 내려와서 각 가정에 2, 3주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간다. 음력 이월은 꽃샘추위와 꽃샘바람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다. 이러한 기상현상을 초자연적 존재가 부리는 힘에서 원인을 찾았다. 영등할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따뜻한 바람을 몰고 왔다가 딸과 함께 차가운 바람을 몰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꽃샘추위가 지나면 봄바람이 부는 현상을 그렇게 인식한 것이다. 혹은 영등이 내려올 때 바람이 불면 딸을, 비가 내리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여겼다. 딸과 함께 올 때는 바람이 치마를 찰랑거리게 하여 예쁘게 하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치마가 비에 젖어서 누추하게 보이도록 한다는 생각이다. 심술궂은 꽃샘바람의 속성을 빗댄 것이다.

오랜 세월 기세등등하던 영등할머니도 사람들의 외면에 힘을 잃었다. 몇 년 전 울산의 어촌을 조사할 때다. 울산 제전마을의 김모 할머니(76)는 시집와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영등고사를 지냈다. “영등을 모셨으면 해를 거르지 말아야지. 소홀히 대접하거나 이유 없이 제(祭) 지내는 걸 중단하면 집안에 큰일이 나. 영등할머니는 심술궂고 변덕이 심해 해코지를 피할 수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김 할머니조차 더 이상 영등고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영등고사를 지내기 전날 김 할머니는 떡과 각종 나물을 준비했다. 이월 초하루 새벽에 음식을 차리고 영등할머니를 떠나보냈다. “몸이 성치 않아서 마지막으로 모십니다. 할머니 잘 계시소.”

과거 제전마을은 집집마다 영등을 모셨다. 특히 동해안에서 바람은 어로활동 여부, 선원들의 안전과 직결되기에 영등을 매우 중요한 신으로 여겼다. 영등고사를 지내기 위해 매년 집집마다 떡과 나물을 장만하느라 어촌 전체가 분주했으나, 이젠 영등할머니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집이 줄을 잇고 있다. 박모 할머니(75)도 몇 해 전에 영등을 떠나보냈다. “자식들에게 영등할머니 모시는 부담을 주면 안 되지요. 내가 모셨으니 내 손으로 보내드려야지요. 그동안 우리 집안 잘 돌봐줘서 고맙심데이 하고 보냈어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줄줄이 작별을 고하니 영등할머니는 갈 곳을 잃었다. 영등을 모셨던 사람들이 노쇠해짐에 따라 영등할머니의 영험도 희미한 흔적이 되고 있다. 올해는 영등할머니가 머물 곳이 제전마을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이월 초하루, 바람의 신은 어느 마을을 헤매고 다닐까.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