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인 직업학 박사
그때나 지금이나 과도한 사교육과 편법은 사회질서를 흐리는 큰 문제다. 하지만 성공을 위한 방법이 ‘공부’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학문을 중시해온 전통 때문인지 공부로 평가한 것만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교육 DNA’는 아마 그렇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삼국시대 이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공부였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광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역사책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고구려 사람은 공부를 좋아하고, 말먹이와 문지기까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놀랐다”는 사신의 기록이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에도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왕실 도서관 임천각(臨川閣)에는 수만 권의 서책이 소장돼 있었고, 여염집 거리에도 책을 파는 서점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쥐베르가 활약할 당시 프랑스 사람의 상당수가 문맹이고 서적은 일부 특권층을 위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표현이다. 실제 지금도 한국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외국 학자들을 보면 대부분 그 근거로 높은 교육열을 들고 있다.
사실 우리 역사는 교육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6000년 전 새겨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고래 잡는 법 등 생업과 관련한 각종 지식을 후대에게 교육하기 위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훌륭한 교과서이자 우리 교육제도의 출발점인 셈이다. 기술 전수를 위한 백제의 박사제도나 신라의 국비유학제도,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도 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은 일관된 전통이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들끓는다. 한국 부모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다는 유대인에 버금간다. 해외서도 마찬가지다. 한인 동포들의 거주지역은 대부분 ‘학군’ 좋은 곳이다. 우리의 큰 자산인 이런 ‘교육 DNA’만 잘 보듬어도 우리의 미래는 ‘매우 밝음’ 아닐까.
육동인 직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