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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뒤흔든 ‘백스톱’ 조항이 뭐기에?…英 ‘여걸 3인방’ 치열한 힘겨루기

입력 | 2019-02-22 14:37:00


야구와 테니스에서 공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막아주는 안전그물을 ‘백스톱(backstop)’이라고 한다. 스포츠에서 유래된 용어가 뜻밖에 유럽을 뒤흔드는 공포의 단어로 변했다. 이제 백스톱은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유럽연합(EU) 소속 아일랜드 간 통행 및 통관 자유를 보장하는 안전장치를 뜻한다. 이 백스톱 조항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최대 화약고로 부상하면서 다음 달 29일 영국이 합의안 없이 EU와 결별하는 ‘노딜(No-deal)’ 브렉시트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백스톱을 두고 국론이 완전히 분열됐기 때문이다.

백스톱 불똥은 영국의 안전과 존립을 위협하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 독립 논란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를 두고 ‘여걸 3인방’이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알린 포스터 북아일랜드민주연합당(DUP) 대표(49),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49),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63)가 그들이다. “백스톱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노딜 브렉시트도 상관없다”는 포스터 대표와 “EU에 남고 싶다. 브렉시트 때 스코틀랜드 독립을 추진하겠다”는 스터전 수반, 둘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메이 총리, 이 세 사람에게 영국의 미래가 달렸다.

● ‘IRA 테러 생존자’ 포스터

2년 전만 해도 영국 내에서도 인지도가 없던 포스터 DUP 대표는 지난달 15일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 부결을 주도하며 정계 실력자로 떠올랐다. DUP가 하원 650석 중 불과 10석(1.5%)을 점유한 초미니 정당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DUP는 1971년 창당 후 46년 만인 2017년 6월 총선에서 가장 많은 의석인 10석을 얻었다. 동시에 보수당의 연정 파트너가 되어 ‘변방 소수자’에서 ‘중앙정계 주역’으로 거듭났다.

2015년 12월부터 DUP를 이끌고 있는 포스터 앞엔 늘 ‘IRA 테러 생존자’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18세 때 통학버스에서 북아일랜드 가톨릭계 무장단체 IRA가 신교도를 상대로 벌인 폭탄 테러를 겪었다. 옆자리 친구의 심각한 부상을 목격했고 방송에 출연해 테러 참상을 고발했다. 그의 부친도 과거 IRA 대원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테러를 겪으며 뼛속까지 반(反)IRA, 영국 잔류 성향을 굳힌 그의 경험은 정치 역정에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벨파스트 퀸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2003년 정계에 입문한 포스터는 당초 온건 신교파 얼스터연합당(UUP) 소속이었다. 하지만 UUP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느껴 1년 만에 강경 신교파 DUP로 당적을 옮겼다. 북아일랜드의회 의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기업통상장관, 재정인사장관을 거쳐 DUP 수장이 됐다.

낙태와 동성혼을 반대하고 사형제에 찬성하는 DUP는 영국 잔류를 강력하게 주창한다. 심지어 성폭행 피해자의 낙태도 반대한다. 설립자인 개신교 근본주의 목사 고(故) 이언 페이즐리는 ‘가톨릭계가 다수인 북아일랜드에서 신교도가 살아남으려면 엄격한 종교윤리에 입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하에 DUP를 만들었다. 그는 1988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교황은 적(敵)그리스도”라고 외쳐 유명세를 탔다. DUP의 반가톨릭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포스터가 백스톱을 반대하는 건 이 조항이 무역 활성화를 넘어 분리 독립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 신교도들은 “영국이 EU와 헤어진 상태에서 북아일랜드만 아일랜드와 자유로운 통관 및 통행을 하면 가톨릭계의 독립 욕구가 높아지고, 아일랜드도 다시 북아일랜드 영유권을 주장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특히 백스톱 조항의 구체적 종료 시한이 없다는 점이 이런 우려를 가중시킨다.

뉴욕타임스(NYT)는 18일 “북아일랜드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브렉시트를 아일랜드 재통일 기회로 여긴다”고 전했다. 실제 일부 택시 운전사들이 “곧 파운드 대신 유로로 택시비를 받느냐”고 농담할 정도로 가톨릭계 주민들의 독립 요구가 심상치 않다. 발끈한 포스터는 언론 인터뷰에서 “백스톱은 ‘피의 레드라인(blood red line)’이다.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를 저해하는 어떤 시도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 ‘페미니스트’ 스터전, “브렉시트 싫다…차라리 독립”

이 와중에 더 큰 폭탄도 터졌다. 바로 스코틀랜드 독립 논란. 메이 총리가 2년 전 DUP에 ‘10억 파운드 당근’을 제시하며 연정 파트너를 제의할 때부터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북아일랜드만 챙기고 우리는 안 챙기느냐”는 불만이 팽배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내 4개 자치지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중 가장 독립 욕구가 강한 곳이다. 특히 중앙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보다 EU 보조금이 많고 지역 경제의 중요한 축도 관광업이다. 역사적 연원이 아니라 ‘돈’이란 현실적 이유로도 브렉시트를 반대할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 후 북아일랜드 문제만 집중 부각되자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11일 “2014년에 이어 다시 독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 3~5년 안에 영국에서 독립해 EU에 가입하겠다”며 대형 폭탄을 던졌다. 그는 8일 뒤 프랑스 하원을 찾아 “브렉시트 후에도 스코틀랜드가 EU에 남을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 브렉시트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큰 타격”이라고 호소했다.

스터전 수반은 포스터 DUP 대표와 동갑내기로 ‘법학 전공 후 정계 입문’ 등 인생 경력도 비슷하다. 글래스고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에 입성했다. 1986년 16세 나이로 스코틀랜드독립당(SNP)에 가입했을 정도로 일찍 정치에 눈떴다. 남편과 친정어머니도 SNP 당원. 다만 낙태를 강력 반대하는 포스터와는 달리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부를 정도로 양성평등에 관심이 많다. 자녀는 없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요구는 북아일랜드와 차원이 다르다. 알짜배기 북해 유전을 보유했고 남서부 클라이드만에 영국군 핵잠수함 기지가 있다. 인구와 국내총생산(GDP)도 각각 영국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런 스코틀랜드를 잃어버리면 정말 ‘영국연합’이 아닌 ‘리틀 잉글랜드’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로선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요구를 동시에 들어주는 것도, 1개만 들어주는 것도 어렵다는 점이 메이 총리의 고민이다.

● 좀비가 된 ‘마담 브렉시트’ 메이

2016년 7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이후 26년 만에 여성 총리가 된 메이. 그는 예상을 깬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 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가 사임하자 갑자기 권좌를 물려받았다. 원래 그는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한 반브렉시트파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총리가 된 데다 본인 소신과도 어긋나는 브렉시트 중책을 맡았기 때문인지 고비마다 악수를 뒀다. 특히 DUP와의 연정은 ‘자신의 발등을 찍은 자충수’이자 현재 대혼란의 단초라는 혹평을 받는다.

메이는 1956년 서식스에서 성공회 성직자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열렬한 보수당 지지자였던 어머니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눈떴다.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중앙은행 등에서 일하다 1997년 정계에 입문했다. 남편은 옥스퍼드대 동문인 필립 메이. 역시 옥스퍼드대 동문이던 파키스탄 최초 여성 총리 고 베나지르 부토가 둘을 소개했다. 한때 필립도 정치를 꿈꿨지만 아내를 위해 포기하고 금융인으로 남았다. 이런 행보가 아내 뒤에서 조용한 외조를 한 대처 총리의 남편 데니스와 비슷해 영국 언론은 그를 ‘데니스의 후계자’로 부른다. 자녀는 없다.

메이는 총리 집권 때 앤드리아 레드섬 에너지부 차관을 누르고 보수당 대표에 올랐다. 당시 레드섬 차관이 “메이와 달리 나는 세 자녀가 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하자 “자녀가 없으면 총리가 될 수 없느냐”고 받아쳤다.

집권 후에는 이런 당찬 면모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총리 취임 9개월 만인 2017년 4월 지지 기반을 더 확보하겠다며 전격적인 조기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두 달 후 총선에서 보수당은 단독 과반에 실패했다. 메이가 DUP를 연정 파트너로 고르자 보수당 원로 존 메이저 전 총리 등이 DUP의 극단 성향을 우려하며 강력 반대했다. 집권이 절실했던 메이는 이를 무시했다. 단순한 연정이 아니라 “향후 2년간 북아일랜드 인프라 구축, 보건·교육 사업에 10억 파운드(약 1조3000억 원)를 쓰겠다”는 선심성 공약까지 내걸었다.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메이는 지난해 11월 브렉시트 합의안을 마련하며 북아일랜드 주민 불편과 경제 악영향을 우려해 백스톱 조항을 넣었다. 이에 반대하는 DUP와 보수당 내 강경파가 지난달 15일 합의안 부결을 주도하자 그의 리더십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영국 역사상 최다인 230표차 부결도 치욕이지만 앞으로도 DUP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점이 더 큰 부담이다.

당내 반란도 심상치 않다. 20일 보수당 내 친(親)EU 성향 의원 3명은 “DUP에 휘둘리는 정당에 남아있을 수 없다”며 탈당했다. 최근 영국 언론은 그를 ‘메이봇(메이+로봇)’ ‘디스메이(dismay·경악)’ ‘좀비 총리’로 부른다. 황기식 동아대 국제정치대학원 교수는 “메이 총리 앞에는 지뢰밭만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영국에 큰 타격”이라고 지적했다.

▼ ‘백스톱 갈등’ 불똥 튄 북아일랜드 ▼

‘백스톱’ 논란 뒤에는 북아일랜드 ‘피의 역사’와 낙후된 지역경제가 있다.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자리한 아일랜드섬은 1171년부터 750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특히 ‘찰스 1세 처형’을 단행한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1653년 아일랜드를 침공하면서 큰 비극이 싹텄다. 그는 반영 시위를 주도한 북부 얼스터 주민을 학살하고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계 개신교도를 대거 이주시켜 땅을 나눠줬다. 부유한 소수 신교도가 가난한 다수 가톨릭계를 지배할 토대를 만든 것이다. 1921년 아일랜드 독립 때 전체 32개 주 가운데 신교도가 지배층인 북부 6개 주는 영국 잔류를 택한다. 지금의 북아일랜드다.

역설적으로 아일랜드 독립 후 북아일랜드 내에선 갈등이 더 심해졌다. 신교도 및 영국 정부의 가톨릭계 차별과 아일랜드로의 통일을 원하는 가톨릭계 주민들의 반발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1972년 1월 영국군은 북아일랜드 2대 도시 데리에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해 14명을 사살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가톨릭계 무장단체 IRA의 무장투쟁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1998년 4월 벨파스트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빈번한 테러로 약 3500명이 숨지고 5만 명이 부상했다.

벨파스트 협정 당시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영국은 약 500km의 북아일랜드-아일랜드 국경을 허물었다. 이후 21년간 아무 제한 없이 하루에 4만 명이 자유롭게 오갔다. 벨파스트 협정 이전엔 특정 물품이 국경을 통과하려면 약 3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20분이면 충분하다.

이를 송두리째 흔드는 변수가 브렉시트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떠나면 EU 회원국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사이에 장벽을 짓고 세관을 두어 통행 및 통관을 강화하는 소위 ‘하드 보더(hard border)’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주민 불편과 경제 악영향을 우려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와 무관하게 2020년까지 EU 관세동맹에 남아 하드 보더를 피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백스톱 조항이다.

하드 보더의 부활은 지역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2015년 북아일랜드 전체 수출의 33%인 21억 파운드(약 3조1000억 원)가 아일랜드로 수출됐다. 2016년 기준 북아일랜드 주민 연소득은 2만7000달러(약 3000만 원)로 서유럽 최저였다. 각각 6만 달러, 4만 달러에 달하는 아일랜드와 영국 전체 1인당 GDP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낮다. 먹고사는 것도 팍팍한 이 지역이 백스톱 갈등으로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