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안 놔?”
20일 밤 12시가 좀 지난 무렵.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클럽. 후드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춤을 추던 여성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한 남성이 자신의 팔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에이, 술 한 잔 하자.” 남성은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여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 경찰 부른다.” 여성은 이렇게 말하고 클럽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성은 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이날 클럽 안 테이블 30여 곳 중 ‘남녀 합석 테이블’은 거의 없었다. 평소 이 클럽은 많은 남녀 손님들이 함께 몸을 부비며 춤을 추거나 한 테이블에서 어울리면서 술을 마시던 곳이다.
● 남녀 합석 테이블 거의 안 보여
클럽 안에서의 마약 투약과 성폭행 의혹 등으로 강남 클럽 ‘버닝썬’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된 이후 강남 클럽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움직임 때문인지 서울 시내 클럽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 본보 기자 4명이 최근 강남과 이태원, 홍대입구 등에 있는 클럽 10여 곳을 둘러봤는데 버닝썬 사태가 불거지기 전에 비해 여성 손님들의 경계심이 부쩍 높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여성들은 남성과의 접촉을 피했다. 클럽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최근엔 남성 손님들까지 줄었다는 게 클럽 관계자들의 얘기다.
20일 오전 1시경 서울 강남의 또 다른 클럽. 춤을 출 수 있는 대형 무대 옆 음료 판매대에서 계산을 하려던 한 여성이 지갑을 떨어뜨렸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남성이 지갑을 주워 여성에게 건네며 목례를 했다. 그러자 지갑을 떨어트린 여성과 동행한 다른 여성이 급히 끼어들어 “작업 걸고 있네”라며 남성에게 눈을 흘겼다. 이 클럽 테이블 20여 곳 중 절반가량은 비어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앉은 테이블은 없었다. 이 클럽에서 만난 김모 씨(21·여)는 “버닝썬 얘기를 들은 뒤로 남자가 다가오면 전과 달리 움찔하게 된다. 처음 보는 남자가 호의를 보여도 왠지 불안하다”고 했다. 진모 씨(20·여)는 춤을 추는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귀퉁이에서 몰려서 동성 친구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진 씨는 “친구가 하도 사정해 오긴 왔는데 계속 구석에만 있게 된다”고 말했다.
● 테이블 비용 직접 내는 여성들도
여성들이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남성들과 어울리는 일명 ‘테이블 돌기’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클럽 영업이사(MD)들이 남성 단골 고객 테이블에 여성 손님들을 데리고 가는 ‘픽업 서비스’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일명 ‘물뽕’으로 불리는 마약류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으로 여성들의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성폭행을 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얘기가 퍼진 뒤로 픽업서비스에 응하는 여성은 찾기가 힘들어졌다는 게 MD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강남 일대 클럽 몇 곳에서 MD로 일하고 있는 A 씨는 “MD들도 요즘 몸을 많이 사린다. 말 좀 붙여보려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여성들도 있다”고 말했다. 권모 씨(21·여)는 “예전에는 클럽 오면 한두 번 정도 ‘테이블 돌기’를 했는데 이제는 안 한다”고 했다.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는 테이블 비용을 직접 계산하는 여성들도 꽤 보였다. 전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여성들은 입장료(대개 1만~2만 원)를 내고 클럽에 들어오지만 테이블을 따로 잡는 경우는 드물다. 테이블 이용료는 적게는 수십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한다. 남성 손님들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는 대부분의 클럽들이 여성 손님에겐 입장료마저 받지 않는다. 남자 손님이나 MD들이 여성들을 테이블로 데려가는 식이다.
이 클럽에서 만난 고모 씨(22·여)는 “테이블을 잡지 않고 서 있으면 모르는 남자들이 접근해 오긴 한다. 좀 비싸긴 해도 내 테이블이 있으면 여기서만 놀아도 돼 마음이 좀 놓인다”고 말했다. 영업이사 B 씨는 “버닝썬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여성들끼리 와서 테이블을 잡고 노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요즘엔 네댓 명이 돈을 나눠 내 테이블을 잡는 여성들이 종종 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본보 기자들이 찾은 클럽들에서는 바텐더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잔술이 좀처럼 줄지 않았다. 바텐더 양모 씨(24·여)는 “예전 같으면 술잔을 올려놓기가 바쁘게 금방 없어졌는데 요즘은 미리 채워놓은 술잔을 가져가 마시는 손님이 많이 줄었다. 특히 여자 손님들은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몇몇 여성들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잔을 채워달라고 바텐더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역시 최근 불거진 ‘클럽 내 물뽕 유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정모 씨(21·여)는 “몇 달 전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성이 건넨 술을 받아 마셨다가 눈앞이 돈 적이 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4시간 정도 기절해 있다가 겨우 깨어났다”며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약물금지’ 경고하고 여성 전용석도 등장
몇몇 클럽에선 여성 손님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강남의 한 클럽 내부 벽면 곳곳에는 ‘약물 반입 금지’라고 쓰인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홍대입구 근처에 있는 한 클럽에서는 입구의 경비원들이 입장하려는 한 남성에게 ‘약물 반입은 일체 금지된다. 여성 손님과 신체 접촉을 주의하라’고 안내했다. 버닝썬 사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다. 그동안에는 손님들이 입장하기 전에 신분증 확인 정도만 했다. 여성 전용석을 만들어 아예 남성의 접근을 차단하는 클럽들도 생기고 있다.
‘클럽을 끊는’ 여성들도 있다. 권모 씨(27·여)는 “전에 클럽에서 만난 남자의 집에 간 적이 있는데 ‘물뽕’을 권유해 경악했다. 버닝썬 사건이 그 때 기억과 겹쳐지면서 이제는 클럽 갈 생각은 접었다”고 했다. 심모 씨(27·여)는 “요즘은 클럽과 분위기가 비슷한 라운지바에 간다. 조명도 밝고 공간도 더 개방돼 있다”고 말했다.
클럽을 찾는 여성들이 줄고 이 때문에 남자 손님들도 덩달아 줄면서 주말 밤이면 늘 비상근무를 서야 했던 클럽 주변 파출소도 출동 건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클럽에서 들어오는 신고는 대부분 성추행이나 폭행 건이었는데 최근 한 달 새 클럽에서 들어오는 112 신고가 많이 줄었다. 클럽을 찾는 사람이 그만큼 줄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남성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20일 홍익대 근처 한 클럽에서 남성과 몸이 부딪힌 한 여성은 “뭐하는 거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남성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몸짓을 했다. 박모 씨(25)는 “클럽에서 여자들한테 이상한 짓을 하는 남자는 극소수일 텐데 남자라고 무조건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말했다.
한성희 기자 che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