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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불교 망쳐”… 만공스님, 日총독 면전에서 호통

입력 | 2019-02-25 03:00:00

경허·만공선양회장 옹산 스님
대처-육식 등 불교의 왜색화 비판… 만해 한용운과도 각별한 교분
독립운동 군자금도 모아 전달




일제 단발령에 반발해 머리카락을 기른 만공 스님 사진 앞에 선 옹산 스님. 예산=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은 우리 선불교를 잇는 고승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37년 스님이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면전에서 일본의 불교정책을 비판한 일은 유명하다.

최근 만공 스님의 체취가 남아 있는 충남 예산군 수덕사를 찾아 경허·만공선양회장을 맡고 있는 옹산 스님(75)을 만났다. 옹산 스님은 만공 스님의 손자 상좌가 된다.

―스승인 원담 스님(1926∼2008)이 생전 만공 스님에 얽힌 일화를 얘기했나.

“은사가 어렸을 때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서울 삼청동의 한 공원에서 노장님(만공 스님)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만나는 것도 봤다고 한다. 한 달 전 92세로 입적한 수연 스님은 은사가 돈 자루를 들었다 놨다 하며 독립운동 자금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만공 스님이 선학원을 창건한 이유는 무엇인가.

“총독부가 사찰령을 통해 조선 불교를 왜색화했다. 그 지시를 받기 싫어 사찰이 아닌 선학원을 세운 것이다. 선학원의 조선고승법회는 부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의미도 있었지만 항일운동을 모색하는 장이기도 했다.”

불교계에서 만공 스님의 ‘할(喝·깨달음 등을 전하기 위해 지르는 소리)’은 이렇게 전해진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전국 사찰 31개 본산(本山) 주지 등을 불러들여 불교정책을 전달하고 건의사항을 듣는 회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만공 스님의 사자후가 터졌다.

“청전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일본 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계율을 파계하고 불교에 큰 죄악을 입힌 사람이다. …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만공 스님의 할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회의에서 일본화된 사찰의 주지들이 총독에게 절을 하고 아첨을 일삼았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꼿꼿한 자세로 일본의 불교정책을 비판했다. 셋방만 살아도 주인집 눈치를 본다고 하는데, 나라까지 잃었는데 총독 앞에서 이런 호통을 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인이자 비구니로 잘 알려진 일엽 스님(1896∼1971)도 만공 스님과 인연이 있다.

“일엽 스님은 머리는 경북 김천에서 깎았지만 만공 스님의 그릇과 법력을 흠모해 스님의 제자가 됐다. 출가 전 일엽 스님이 일본인과 결혼해 아들을 뒀는데, 그분이 10여 년 전 입적한 일당 스님이다. 일당 스님은 어릴 때 일본인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만공 스님의 군자금 심부름을 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만공 스님의 독립유공자 심사는 어떻게 됐나.

“만공 스님의 할 사례는 긍정적이지만 종교적인 의식이지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고, 독립자금 후원도 입증이 어렵다는 회신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자금을 주고 영수증을 받았겠나?”

이날 동행한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불교계 독립운동에서 만해 스님의 역할이 아버지였다면 만공 스님은 어머니였다”며 “선학원 설립과 총독 앞에서의 ‘할’, 독립운동 지원으로 이어지는 만공 삶의 화두는 우리 불교와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예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