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보석 심문 출석해 의견 밝혀 검찰 "구속 당시와 사정변경 없다" 양승태, 작정한 듯 2700여자 토로 "검찰, 재판 과정 이해 못하는 듯" "무소불위 검찰과 마주해야 한다" "형평과 공평 맞는지 묻고 싶다"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이 구속 후 첫 법정에 나와 “검찰은 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300여쪽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다”고 항변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 심리로 열린 보석 심문기일에 출석해 이같이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9일 불구속 재판을 허용해달라며 법원에 보석을 청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1시58분께 정장 차림으로 어두운 표정을 한 채 법정에 들어섰다. 1975년 임관해 40여년을 법관으로 지내온 양 전 대법원장이지만, 그는 잠시 착각한 듯 증인석에 앉았다가 법정 경위의 안내로 변호인들 옆 피고인석에 착석했다.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이 보석 허가 필요성에 대해 주장한 후 검찰은 “구속영장 발부 이후 구속 사유와 관련된 아무런 사정 변경이 없다”며 “피고인이 수사 및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하급자에게 책임을 전가해 증거인멸 우려로 영장이 발부된 것”이라며 보석 허가가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검찰의 주장이 이어지는 동안 양 전 대법원장은 검사석을 응시했다. 검찰의 주장이 끝난 뒤 재판부가 “마지막으로 피고인이 보석 청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양 전 대법원장은 작심한 듯 검찰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며칠 전에 구치소에서 수용자들이 제 방 앞을 지나가면서 ‘대한민국 검찰이 참 대단하다. 우리는 재판을 받아 법원을 하늘같이 생각하는데 검찰은 법원을 꼼짝 못하게 하고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하기도 했다’고 얘기했다”며 “저는 이 사람들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검찰은 형사 문제밖에 없다는 법원의 자체조사에도 불구하고 정말 영민하게도 목표 의식에 불타는 수십명의 검사를 동원해 법원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면서 “흡사 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300여쪽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또 검찰의 방대한 수사기록과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점을 거론하며 보석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어쨌든 저는 이제 공소장에 대해 ‘무(無)에서 무(無)’일 뿐이라며 대응해야 하고,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서야 한다”며 “제가 가진 무기는 하나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명감 불타는 검사들이 법원을 샅샅이 뒤져 만든 20여만쪽에 달하는 증거자료가 내 앞을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내 몸이 있는 구치소는 책 몇 권을 두기도 좁은 공간”이라면서 “그런 공간에서 20여만쪽의 증거자료를 검토하는 건 아마 100분의1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내가 이 사건 조사가 진행될 때 혹시 오해를 받을까 봐 보고 싶은 후배하고도 전화 연락을 하지 않고, 전화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런 제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우리 법원의 정의의 여신상에는 천평칭이 손에 들려있는데 이는 형평이나 공평 없는 재판 절차에서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며 “방대한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못하고 재판하는 것이 과연 형평과 공평에 맞는 것이고, 실체적 진실구현에 합당한 것인지 항상 묻고 싶다”고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저는 공평과 형평이라는 형사소송법이 지배하는 법정 안에서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고, 형소법 원칙과 이념이 구현돼 재판 절차에서 정의가 실현되길 바란다”면서 “재판부에서 이런 점을 양해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700여자 되는 장문의 글을 원고도 없이 13분 동안 검찰을 향해 쏟아냈다. 마치 검찰의 주장에 작정한 듯 쉬지도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원고를 따로 준비한 적 없다”며 “변호인과 따로 상의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