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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서 탈피 히말라야서 만난 ‘태초의 행복’

입력 | 2019-02-26 18:05:00


매캐한 서울 하늘을 보면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태초의 맑은 공기를 맡고 싶었고, 권태로운 일상에 경계를 짓고 싶었다. 그리하여 떠난 곳, 네팔 히말라야. 결과적으론 14년만의 폭설로 목표 지점을 앞두고 아쉽게 하산해야 했지만 익숙해져온 도전과 성취 대신 순응과 겸허함을 얻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익숙하다 못해 진부해, 중요하지만 잊고 살았던 난제 ‘행복’에 대해 아주 오랜만에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밤 10시 취침, 새벽 6시 기상. 온종일 걷고 때맞춰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이 이어졌다. 눈 덮인 산길은 초보 트래커에게 생각보다 냉엄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길, 가지 않는 시간을 보며 괜한 욕심을 부린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물도 없거니와 행여 감기라도 들새라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물티슈로 해야 했고,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화장실 때문에 산행 내 전전긍긍 했다. 밤이면 침낭을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한기에 머리털 하나라도 삐져나올 새라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잠들기 일쑤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먹고 잘 잤다는 것이다. 매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니 뭘 먹어도 꿀맛이었고, 맑은 공기 탓인지 매일 아침 신기할 정도로 말끔히 눈이 떠졌다. 낮에는 산을 오르고 밤에는 일기를 썼다. 한껏 땀 흘리고 실컷 생각했다. 행여 고산증에 안 좋을까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고, 대신 겨울날 난롯가에서 즐기는 차 한 잔의 호사스런 즐거움을 배웠다. 바쁜 일상에 치여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땀 흘리고,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자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쩌면 우리는.
방은 난방이 전혀 안 되기 때문에 일과를 마친 트레커들은 ‘롯지 식당’의 난롯가로 모여들었다. 젖은 신발을 벗어 말리며 대개 차를 한 잔씩 마신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손끝부터 전해오는 온기. 몇몇은 꾸벅 꾸벅 졸면서도 방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려 애쓰는 듯 보이고, 몇몇은 일기를 쓰며 하루를 갈무리한다. 그리고 이내 이야기꽃이 핀다.

트레킹 중에는 만나는 모든 이가 스승이자 벗이다. 국적도 언어도 다르고 이름도 직업도 모르지만 ‘완정’이라는 하나의 목표,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를 격려한다. 산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길을 내어주기 때문에 결코 경쟁하지 않는다. 나보다 앞서 길을 나선 모든 이들은 무엇이든 배울 점이 있기에 모르는 이에게도 선뜻 조언을 구하고 상대편 또한 선뜻 도움을 건넨다. 신뢰와 응원에 기반한 낯선 이들과의 교류는 그 자체로 따듯한 수프 같았다. 늘 날이 서있던 일상에서 경계심으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구석구석 녹여주었다.
하산 길, 멀어지는 설산과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내려가면 일주일만에 머리도 감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시원한 맥주도 한 잔 하고, 자축의 삼겹살 파티도 벌이고, 바스락거리는 침구를 덮고 자겠지만 어딘지 아쉽다. 태초의 깨끗한 공기와 더불어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온전히 편한 이 ‘태초의 행복’이 너무나 그리울 것 같다.

김지영 원스토어 eBook사업팀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