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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임희윤]삶을 채우는 소리, 어지럽히는 소리

입력 | 2019-02-28 03:00:00


임희윤 문화부 기자

얼마 전 만난 안병진 경인방송 PD, 김용석 음향감독, 이진희 방송작가는 경기와 인천 지역의 사라져가는 소리를 3년째 채록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들은 인천 교동도에 갔다. 800년 된 은행나무의 소리를 담기 위해 나무 밑에 무작정 녹음장비를 설치했다. 소리는 났지만 그것은 나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람이나 새의 소리였다.

마침 그때 은행나무 옆에 사는 할머니가 커피 한잔을 건넸다. 촌로의 친절에 겸상을 했다 할머니의 가족이 북에 있다는 애달픈 사연을 듣게 됐다. 마침 문제의 은행나무에도 북한의 수나무를 그리워한다는 전설이 서려 있었다. 안 PD 팀은 새소리, 바람 소리에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해 프로그램 제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있다. 그런 소리들은 쉽게 사라져 가기도 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다루는 입장에서 음악에 ‘음’자만 나와도 귀가 솔깃해진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 때도 그랬다. ‘보헤미안 랩소디’ ‘그린북’ ‘스타 이즈 본’처럼 음악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조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운드트랙이 돋보이는 ‘블랙 팬서’나 ‘블랙클랜스맨’도 마찬가지다.

다만, 음향믹싱상과 음향편집상을 모두 ‘보헤미안 랩소디’가 쓸어간 것은 아쉬웠다. 함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실패한 ‘로마’야말로 음향이 큰 역할을 한 영화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PD와도 ‘로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감독은 중요한 장면일수록 음악은 줄이고 음향을 키웠다. 컬러 대신 흑백으로 영상을 구성한 것도 관객으로 하여금 소리에 더 집중하게 하는 장치였는지 모르겠다.

라디오 소리, 빨래 개는 소리, 개 짖는 소리 같은 평화로운 일상의 잡음이 영화의 현장감을 돋운다. 아이가 파도에 휩쓸려 가는 절체절명의 장면에서도 ‘죠스’풍의 음악으로 압도하는 대신 자연의 파도 소리를 강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감독은 카메라를 고정한 채 새소리, 계단 밟는 소리, 비행기 소리만을 눌러 담는 식으로 여운을 남긴다.

안 PD는 소리 채집 작업을 시작한 동기로 ‘무소음의 시대’를 꼽는다. 현대인의 일상은 점점 무소음 에어컨, 무소음 공기청정기, 무소음 기계에 둘러싸여 간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으로 귀를 감싸고 다닌다. 층간소음 문제로 살인도 일어난다. 아파트는 타인의 삶을 억지로 합쳐 수직으로만 쌓아올린 주거 형태이다.

무소음 세상이란 단순히 소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의 사정에 ‘귀를 기울인다’는 가치가 바래 가는 것과도 관계 있다. 불필요한 소음은 삶을 어지럽히지만 어떤 소리는 삶의 빈 곳을 채운다.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나 각종 오디오 콘텐츠 열풍이 어떤 결핍의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애써 비우고 진공으로 만든 침묵의 자리에 재개발된 소리를 채워 넣는 인위적 과정인지도….
 
임희윤 문화부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