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전면 or 일부 해제, 영변 일부 or 전체 설전 감정싸움 아닌 치열한 프레임 싸움, 국제 여론전
북한과 미국이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원인을 놓고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회담 결렬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우호적인 여론을 확보하기 위해 프레임 싸움을 벌이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달 28일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마무리 되자 전격적으로 심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제재의 전면 해제가 아니라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일부 항목’의 제재를 요구했으며 영변 지역의 모든 핵물질 생산 시설을 미국 전문가 입회 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한다는 ‘현 시점에서 최대한의’ 비핵화 조치를 제안했다는 취지였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그(김정은 위원장)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그는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며 협상 결렬의 책임을 김 위원장에게 돌리자 리 위무상이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반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리 외무상의 기자회견 입장 발표 직후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우리가 제안한 것은 영변 핵 단지 전체에 대한 영구적인 폐기”라며 “역사적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제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 측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같다”고 덧붙였다.
양측의 설전은 당일로 끝나지 않았다. 필리핀을 방문 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1일(현지시간) “북한이 영변에 대해 꽤 광범위하게 (비핵화를) 하려고 했다”면서도 “그들이(북한)이 내놓으려고 준비한 것의 전체 범위에 관해 여전히 전적으로 명확하지는 않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제재의 ‘일부 해제’를 요구했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나는 그들(북한)이 말장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들이 요구한 건 기본적으로 모든 제재의 해제”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말하는 2016~2017년 채택된 유엔 제재 결의 5건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에 주는 항목은 대북제재의 핵심이기 때문에 사실상 제재 전체를 해제하란 뜻이라는 취지다.
하지만 최선희 부상은 1~2일 이틀간 두 차례 한국 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입장을 강변했다. 북한 당국자가 남측 취재진의 질문을 피하지 않고 계속 답변을 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최 부상은 “영변은 다 내놓는다고 했다”며 “(영변을 다 내놓은 건) 명백히 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이 “미국의 거래방식, 계산법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고 계신다”며 “신년사로부터 시작해서 상응조치가 없으면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입장도 표시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뭔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측의 반응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진실공방에는 북미 상호 간의 인식 차이와 함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기대를 모았던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데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넘기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모두 2차 북미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 했다.
미국이 영변 외 핵시설과 미사일, 핵탄두 폐기, 핵목록 신고 작성을 북한에 공개적으로 압박하자 북한이 이에 밀리지 않겠다며 반격에 나선 것으로도 풀이된다. 향후 협상을 염두에 두고 양측이 기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쁜 거래를 하느니 거래를 안 하는게 낫다’며 배수진을 쳤다. 북미 협상이 진전을 보려면 북한이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에 리 외무상은 “우리의 이러한 원칙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고 최 부상은 판을 깰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샅바싸움을 하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북미가 공방을 벌이면서도 협상은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히는 데 주목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을 통해 회담 결렬의 이유를 기자들에게 설명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나 미국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자제하는 매우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 북한과 계속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밝혔다.
북미 공방이 회담 결렬에 따른 ‘감정 싸움’이 아니라 향후 협상을 고려한 냉철한 ‘말 겨루기’로 볼 수 있는 이유다.
북미 양측이 적극적으로 언론 응대에 나서는 건 자국에 우호적인 국제사회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행보로도 읽힌다. 양국이 근본적인 입장 차를 확인한 가운데 ‘제재’란 쟁점에 있어선 국제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1일 기자회견에서 “이 제재들은 미국의 제재가 아니라 모든 국가가 찬성표를 던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짚은 것은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당장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를 이끄는 크리스토프 호이스겐 유엔 주재 독일 대사는 1일(뉴욕 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를 봐서 알겠지만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국제사회의 목표에 조금도 근접하지 못한 상태”라며 앞으로 몇 주 혹은 몇 달간 현 제재 체제에 변화를 줄 어떤 이유도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김 위원장과 통화해 결과를 자신에게 알려주길 바란다’며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당부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1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원과의 전화 통화에서 “유엔의 대북 제재는 여전히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핵이 없는 북한을 보기 위한 세계의 노력에 핵심적인 기둥”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서울=뉴스1)